영화 <댄서>, 세르게이 폴루닌
재능은 타인을 매료시킨다. 비틀즈의 노래, 마이클 잭슨의 춤, 김연아의 스케이팅… 우리는 그들의 재능에 감탄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열광한다.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다. 크기도 작기도 하다. 많기도 적기도 하다. 나에게도 어줍잖은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 재능의 크기가 너무 커 숨길 수가 없는 사람들. 발산되고야 마는 사람들. 그들의 재능에 압도되고 감탄하는 만큼 우리는 그들의 삶을 궁금해한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축복일까 저주일까.
평범한 우리가 보기에 재능은 당연히 축복이다.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멜로디를 술술 써내려 갈 수 있다면, 움직이는 나의 몸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훔치고 싶다.
<댄서 Dancer>는 그런데,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은 영국 로열발레단 최연소 수석 무용수가 된 남자다. 우크라이나 작은 해변 동네, 가난한 가정 출신에서 세계적인 발레단의 스타가 됐다. 빌리 엘리어트의 실사판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는 곧 발레계의 배드보이에 등극한다. 파티와 마약을 탐닉하고 온 몸에 문신을 새긴다. 발레리노의 몸에 문신이라니. 언론이 떠들석해 진다. 그 정도의 재능을 가졌으면서, 그렇게나 노력했으면서 대체 왜. 결국 그는 로열발레단을 탈단하고 러시아로 떠난다.
평범한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런 재능을 가졌으면 당연히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없지만 당신은 출 수 있는 사람이니, 적어도 그 높은 세계의 아름다움을 구경은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평범한 내가 그렇게 외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그는 우리를 위해 재능을 발휘해야만 하나. 누가 그에게 그런 의무를 부과할 수 있나. 누군가가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 운동선수 등 그 무엇이라도 그에겐 언제든 떠날 권리가 있다. 춤이 추기 싫으면 그만 출 권리, 노래하기 싫다면 그만 할 권리, 운동이 하기 싫으면 그만 둘 권리.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재능은 그들 자신의 것이지 공공재가 아니다.
물론 예술은 그 특성상 감상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보아주는 이가 없고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노래도 춤도 의미가 없다. 예술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날 권리가 있다. 더이상 춤 추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데 감상자를 위해 무대에 남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결국 지켜보는 우리도 괴로워질테다.
은퇴를 결심했던 세르게이 폴루닌은 결국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춤이라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거다. 세르게이가 다시 춤을 춘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인간의 몸이 그려내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조금더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르게이도 새로운 동력을 얻었을 거라 믿고 싶다. 춤 추는 것이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혹여나 그렇지 않아 또다시 떠나겠다 결심한다면 떠나보내주고 싶다. 그 젊고 빛나는 가능성이 재능이라는 죄목으로 떨어지는 핀조명 속에 외로이 가둬지지 않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c-tW0Ckvd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