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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Dec 01. 2017

연말연시를 함께 하고픈 영화들

아니, 뭘 했다고 벌써 12월이야, 라고 내뱉고 보니 익숙하다. 나는 항상 이렇게 투덜댔었지. 벌써 몇 년째 똑같은 생각으로 한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나 발전이 없어서야.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정말로 올해도 한 게 없는걸. 회사만 왔다 갔다 했더니 어느덧 1년이 가고 있다. 시간이 너무 야박해, 억울해 징징대고 싶지만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다. 올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냈던가. 나의 문제는 스스로의 게으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거다.


그나마 꾸준히 한 것이 있다면 영화보고 책 읽는 정도. 올해 나에게 칭찬해 줄 일이 있다면 다시 책을 좀 읽기 시작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물론 어느 정도 보긴 했지만 예년에 비하면 열정이 살짝 꺾였다. 기꺼이 영화관의 넘버원 호갱이 되어주고자 했는데 의리를 지키지 못했다. 미안해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연말이 다가오니 이런 저런 영화가 생각난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를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적응기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한 열흘정도. 새해가 왔음을 실감하고 각오를 다질 시간. 아 물론 놀고 싶다는 소리다.) 어쨌든 연말연초가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는한다. 나이 먹는 게 좋을 것까진 없어도 싫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 소리하면 더 나이들어 보이니까 여기서 접기로 한다.


영화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나는 크리스마스건 새해건 밖에서 보내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끄럽잖아. 스쳐가는 사람들의 어깨와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소음에 치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공포감에 얼어붙는다. 올해도 어떻게든 조용히 보내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러나 그 모든 걸 각오하고 길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집구석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면 산타가 왔는지 안왔는지, 눈이 내리는지 그치는지,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는지 말았는지 도무지 실감이 안난다.(나는 대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잠들곤 했다.) 사각형 쪼마난 방에 갇혀서도 바깥 분위기는 좀 느껴보고 싶긴 할 때, 캐롤과 영화만한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주로 요 두 가지로 연말을 실감하곤 했다. (너무 사회부적응자같아 보일까봐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집에만 박혀있는 건 아니다. 친구도 만나고 맛있는 걸 먹으러가기도 한다. 웬만하면 사람없는 곳을 찾아다녀서 그렇지. 이렇게 덧붙이는 게 더 히키코모리같아 보일까?)


유독 연말에 보면 좋은 영화들이 있다. 이 시기엔 영화의 만듦새에 좀 관대해진다. 분위기가 좋으면 그만이다. 이건 그냥 철저히 주관적인 내 관점이긴 한데, 요맘때 어울리는 영화라면 일단 따뜻하고(휴먼 코미디), 음악이 나오고(뮤지컬), 클래식(흑백영화까진 아니어도 90년대 감성이면 좋겠다)해야 한다.


올해는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까 혼자 고민해 본 김에 연말연시에 보면 좋을 영화 몇 편을 추천해보고자 한다. 물론 완벽하게 내 취향에 의거한다.



첨밀밀

甛蜜蜜. 1996


아빠는 젊을 적에 음악을 좋아했다. 레코드판도 많이 모으고 CD도 꽤 쌓아뒀었다. 집에 제대로 된 음향기기는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엄마와 실랑이 끝에 들여 놓았던 커다란 전축이 기억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못한 채 어느샌가 집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CD를 플레이시켜 놓고 음질이 좋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던 아빠의 모습만은 어쩐지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각인돼 있다. 첨밀밀은 아빠가 즐겨 듣던 곡이었다. 약간 촌스러운 느낌이 나지만 나 역시 그 곡을 좋아했다. 어린 귀에도 고운 목소리에 예쁜 노래였나보다.


영화 <첨밀밀>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사실 여름의 장면들이다. 주식 거래소였던가, 초콜릿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더운 날씨에 장만옥과 여명이 함께 앉아 있던 장면이 나의 베스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겨울과도 참 잘 어울린다. 사실 이맘때, 그러니까 90년대 중후반에 나온 작품들은 내용과 별개로 따뜻한 느낌이 강한데, 아무래도 이 시기 특유의 영화 색감 때문인 것 같다. 약간 누렇고 바랜 느낌이 드는 필름의 온도가 좋다. 무엇보다 등려군의 첨밀밀을 듣는 맛이 있다. 그리운 그 목소리를 타고 발길이 맞닿게 되는 엔딩까지 보고 나면 바깥의 찬 공기가 조금은 덜 무서워 진다.




렌트

Rent. 2005


고백하자면 나는 뮤지컬 렌트 공연을 본 적은 없다. 영화로 접한 게 다다. 그러니 렌트 별로다, 라는 평은 영화에 한정해 들어주길 바란다. 워낙 유명한 뮤지컬이길래 영화도 나름 볼만하겠지 기대하고 봤다가 음. 영 엉망이기에 실망이 컸다. 그럼에도 <렌트>를 꼽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 시기에 보는 영화는 만듦새가 중요하지 않다. 외려 좀 뻔한 영화가 좋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히치콕이 울고 갈 서스펜스를 굳이 연말에 보고싶진 은걸. 분위기와 흥으로 보는 영화가 제격이다.


렌트의 원작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으로, 19세기 말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주인공이다. 렌트는 이 이야기의 무대를 20세기 말 뉴욕으로 옮기며 제작자인 조너선 라슨의 자전적 경험담과 결합시켜 완성되었다. 뉴욕 슬럼가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신세대 예술가들이 절망 속에 찾아온 기적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희망적인 작품과는 달리 제작자인 라슨이 렌트의 브로드웨이 공연 개막을 하루 앞두고 뇌출혈로 돌연 사망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괜히 묘한 기분이 된다. 자신의 죽음으로 작품 속 인물을 되살려낸 것은 아닐지.


토니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을 정도로 이미 렌트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뮤지컬 넘버들도 무척 훌륭하다. 아쉽게도 영화화하며 많은 넘버들이 편집되긴 했지만, <렌트>의 막을 여는 Seasons of Love 공연만으로 뭐가 어찌 되었든 다 용서하게 된다.




사랑의 행로

The Fabulous Baker Boys. 1989


또다른 음악 영화이자 로맨스 영화. 뮤지컬도 좋고 다 좋지만 왠지 연말은 재즈와 가장 합이 잘 맞는다. 재즈하면 이미 유행이 흘러간 이미지가 강하지만 외려 그래서 묵은 해를 떠나보내는 시점과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괜찮은 재즈 영화들이 은근히 많기도 하니 이럴 때 한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최근에 큰 사랑을 받았던 다미엔 샤젤 감독의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있다.(위플래쉬는 한해를 마감하며 보기엔 좀 악랄한 선택같지만.) 에단 호크가 열연한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의 전기 영화 <본 투 비 블루>도 볼만 하다. 물론 제목만큼이나 울적한건 각오해야 한다. 쳇 베이커의 질투를 받았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전기 영화(<마일스>)도 작년에 개봉했는데 이쪽은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모베터 블루스>도 좋았고, 칸과 아카데미를 모두 사로잡은 밥 포시의 <올 댓 재즈>, <캬바레>를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12월에 가장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무래도 역시 <사랑의 행로>다. 3류 클럽을 전전하던 재즈 피아니스트 베이커 형제가 콜걸 수지(미셸 파이퍼)를 가수로 고용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동생인 잭(제프 브리지스)과 수지 사이를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가 좋다. <사랑의 행로>라면 그 장면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미셸 파이퍼가 빨간 이브닝 드레스를 차려입고 잭이 연주하는 피아노 위로 올라가 Makin' Whoopee를 부르는 장면. 이제는 전성기를 지난 배우의 가장 아름다울 시절,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장면이 아름다울수록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슬픔이다. 어쨌든 아름답다는게 증요하니까.




해리 포터 시리즈

Harry Potter. 2001~2011


사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기에 가장 좋은 영화는 해리포터 시리즈라 생각한다. 특유의 영국 분위기, 호그와트 전경, 아이들 목에 감긴 기숙사 목도리 색깔, 편지를 배달하는 부엉이, 그 모든 게 너무나 크리스마스적이다. 게다가 각 시리즈가 호그와트 학생들이 모두 모여 연말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는 점까지 완벽하다. 내용이야 늘 봐왔던 그대로니까 집중할 필요도 없다. 해리, 론, 헤르미온느의 목소리, 귓가에 자동으로 재생되는 테마송만으로 어쩐지 나는 경험하지도 않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향수 속에 젖어들고 만다. 발 맞추어 걷는 것 같았던 해리의 시간들은 멈추어 서고, 이제는 나의 세월만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끔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역시 올해도 해리포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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