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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Dec 27. 2017

12월의 영화들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위대한 쇼맨, 패터슨

웬만하면 최신 영화는 본대로 정리해서 올리자 생각했었으나 연말에 일이 바빠지면서 전혀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간략하게나마 몰아서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정리해본다.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

Star Wars : The Last Jedi,2017



평단과 관객의 평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이쪽의 감탄과 저쪽의 불평에 모두 끄덕끄덕하며 팔랑대다보니 정작 나의 감상이랄 게 없어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팽팽히 맞서는 양측의 주장이 나름대로 모두 일리 있어 보이는걸 어쩌나. 굳이 따지자면 관람 후 시간이 좀 흐른 지금 시점에서 나의 입장은 팬덤의 편으로 약간 기운 상태다.


‘스타워즈’라는 거대 블록버스터 영화가 라스트 제다이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은 분명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시리즈의 역사를 뒤엎고 거창한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라스트 제다이의 태도야 말로 가장 ‘포스트 모던’적인 시도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쓰잘데 없다고 욕먹었던 카지노 장면이나, DJ(베네치오 델 토로)의 캐릭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스타워즈의 팬은 아닐지언정 나도 무언가를 사랑하는 ‘덕후’ 중 한 사람으로서 팬들이 느낀 분노에 마음이 가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특히나 스타워즈 세계관은 그에 열광하는 팬덤에 의해 발전해온 몫이 크지 않나. 조지 루카스가 만든 허술한 밑그림 위에 온 마음을 다하여 깊이를 부여하고 색을 칠해 온 사람들은 바로 팬들이었다. 아론 소킨처럼 철저한 대본을 써낸 것도, J.R.R. 톨킨처럼 빈틈없는 세계관을 구축한 것도 아닌데 조지 루카스의 세계가 이렇게나 커질 수 있었던 건 ‘포스’가 무엇인지, ‘제다이’는 왜 존재하는지, ‘포스의 균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은 증거의 조각들도 놓치지 않고 토론하고 이야기해 온 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불려온 사람들 역시 이 이야기에 동참하며 스타워즈는 신화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라스트 제다이는 너희들이 집착해 온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 다 부질없는 짓이란다-라고 말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러니 배신감이 들 수 밖에. 진성팬이 아닌 나도 이렇게 속상한걸.


다 떠나서,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솔직히 지루했다. 자기 희생을 못해 안달인 인물들이 줄줄이 한방씩 치고 빠지는 라스트 제다이의 마지막은 절정만 다섯 번이 연달아 이어지는 것 같은 피로감을 준다. 다들 너무 멋있는 사람들이라 감당이 안되더라.


그럼에도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시원하게 뒤집어 엎은 판을 어떻게 이끌고 갈지 예상이 안되기 때문이다.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후속편을 보고 내리는 게 맞을 것 같다. 과연 이 전복의 미학을 제대로 이어받은 후속편이 가능할 것인지, 디즈니가 과연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둔 수인지, 일단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 볼 생각이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Soulmate,2017



그렇다. 여성의 우정에도 역사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사실인데 우리 영화계는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중국에서 날아온 이 영화가 감사하게도 새삼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얼핏 뻔한 사랑과 우정의 삼각관계에 매몰되는 듯 했던 이야기는 다행히 사랑의 격동 속에서도 우정의 지위를 지켜낸다. 영화의 중심은 사랑으로 옮겨가지 않고 끝까지 우정을 응시한다. 안생 역을 맡은 주동우 배우의 버거운 웃음이 이 우정의 드라마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위대한 쇼맨

The Greatest Showman, 2017



쇼 비즈니스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P.T. 바넘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이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리게 한다. 과장 광고의 달인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바넘은 무척이나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위대한 쇼맨>은 바넘의 이야기를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성공 스토리로 평이하게 각색하였다. 연말 시즌에 관객 몰이할 대중 영화를 지향했으니 목적 의식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방향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바넘은 실존 인물이고 그의 사기꾼적 행적과 흔히 프릭쇼(Freak Show)라 일컬어지는 서커스의 기원을 떠올린다면 흥을 돋우는 노래와 공연 사이에서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퍼포먼스가 엉망이면 속 편하게 손가락질하고 고개를 돌리면 될텐데 노래와 춤이 대단한 볼거리인 건 사실이다 보니 더욱 마음이 복잡해진다. 라라랜드에서 엠마 스톤, 라이언 고슬링이 너-무 노래를 못해 싫었다던 몇몇 사람들이 본다면 만족할 법한 뮤지컬이다. 등장하는 배우 모두의 노래 솜씨가 수준급인데다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도 무척 좋다.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는 바넘(휴 잭맨)이 칼라일(잭 에프론)을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밀고 당기며 흥정하는 곡 The Other Side에 맞춰 펍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고전적이면서도 센스가 돋보인다. 특히 가운데서 대사 하나 없이 둘의 공연을 보조하는 펍 주인은 씬스틸러로 꼽을 만 하다.


<위대한 쇼맨>의 미묘한 지점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물의 특성을 영화가 고스란히 이어받아 왔다는 점이다. 바넘이 관객의 머리 위에서 그들을 기만하며 성공에 이르렀던 것처럼 <위대한 쇼맨> 역시 즐겁고 흥겨운 음악과 춤 속에 불편한 진실을 슬그머니 감춰둔다. 그것이 의도였든 아니든 영화는 바넘의 교훈("관객들은 속기를 원한다")을 완벽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쇼 비즈니스의 술수에 기꺼이 속아주며 마음 편히 화려한 춤과 노래를 감상할 수도 있고, 영화의 재미를 잃을 지언정 꼿꼿하게 자존심을 지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바넘의 쇼가 2017년의 영화관에서 여전히 관객과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고 조금 억울한 기분이다.



패터슨

Paterson, 2017



이 영화를 두 번째 보고 올해 아껴두고 있던 별 다섯 개를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좋아하는 친구와 조용한 극장에서 보았다는 외적 조건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패터슨은 다시 보니 더욱 아름다운 영화였고 나는 조금 위안을 얻었다.


주인공 '패터슨'은 영화의 배경 도시인 '패터슨'과 동일시된다. 패터슨을 이루는 것들, 패터슨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시인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과 자유분방한 예술가 로라 부부는 예술가의 두 자아를 상징하는 듯하다. 자기 표현에 서툴지만 성실한 패터슨과 어설프지만 자기애로 가득찬 로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면서도 한 침대, 한 공간을 공유하며 공존한다. 예술가의 자아는 둘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 자아 사이를 널뛰기 하고 있는 것과 같고 이런 불안정성은 많은 예술가들을 극단으로 내몰곤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서로를 북돋우고 감싸면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어낸다.


<패터슨>은 또한 일상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영화의 형식은 기어이 그 자체를 한 편의 시로 완성한다. 마치 시가 그런 것처럼 아름다움은 결국 엇비슷해 보이는 하루들에서 발생한다. 어쩌면 일상의 자장에서 튀어 나온, 일상과는 이질적인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매일 사용하는 성냥갑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비쳐오는 햇살에서 어제와 다른 질감을 느끼는 것. 이 평화로운 도시의 패터슨을 시인으로 만드는 건 이처럼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무심코 흘려보내곤 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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