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들뜬 여름이 지나고, 띠링- 이렇게 더운데 절기는 처서라는 알림이 온다. 벌써 가을이 오는 건가? 나이가 들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감을 느끼고 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무섭게 1월에 새웠던 다이어트라는 계획은 매년 초 작심삼일 계획으로 당연시 묵혀둘 정도로 말이다. 제주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은 4계절 중에 비수기라고 한다. 겨울이 비수기 일 것 같지만 되려 가을이 비수기인 이유는 단풍과 은행나무가 육지보다 많이 없다는 사실이다. 단풍나무는 물을 머금고 있어야 하는데 제주도는 화산 섬이라 육지만큼 화려한 색을 뽐내지는 못한다고 한다(물론 몇몇 단풍으로 예쁜 곳은 있다.) 대신 언제 가도 좋은 숲이 있으니 숲세권에 살고 있으니 이걸로 위안이다.
최근에 캠핑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대표님을 만나 숲을 걷게 됐다. “취미가 있으세요?” “저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합니다” “얼마 만 큼이요, 얼마나 오랫동안이요, 정말 좋아하세요?” “네?” 이건 아빠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하는 답을 원하는 게 아닌 것 같고, 네 저는 하루에 100장 정도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을 좋아합니다 같은 정량적인 수치를 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내게 유일한 취미라고 생각했던 사진인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답변을 못한 혹들이 달린 기분이다. 대표님과 이야기해보니 골자는 이랬다. 요즘 캠핑이 붐인데 캠핑 자체를 즐기는 사람보다 장비를 사서, 괜찮은 브랜드에 혹해 가득 쟁여놓기만 하고, 오랫동안 캠핑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님의 가방을 보니 텀블러와 에너지바 아주 가볍게 챙겨오셨다. 에이 그래도 장비라도 사야지 캠핑을 가는 한 발을 띄우는 것이 아니냐, 이게 나한테 좋은 게 많은지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과정이 아닐 가요라고 다시금 말했다. 캠핑, 트레킹 자체 그러니 자연에서 온전히 내가 되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며 하나 둘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어떤 게 맞는지 필요한 과정이 없어 아쉽다는 것이었다. 요즘 취미 부자들이 많다. 예전에 하나만 끈이 있게 하는 것도 지구력이라면 이것저것 곁에 하고 싶은 것을 두고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취미 부자처럼 말이다. 흥미가 떨어질 때쯤 또 다른 걸로 생기를 찾고, 다시 또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도 지구력이 생기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도 즐겁지만,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고 꾸준히 하는 것 또한 힘들다. 이건 사람 관계도 똑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새로운 것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어느 순간 결이 맞는 친구들과 곁에서 오랫동안 발맞춰 걷고 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것 또한 지구력
대표님과 걸었던 숲길을 다시 혼자 걸어보았다. 사진과 내가 가진 사이에서 지구력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의 눈치 없이 즐겁게 찍는 것이었다. 필름 카메라 하나 들고 골목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매번 같은 지붕, 같은 골목길이라도 걷는 순간 온전히 나 스스로 즐겁다면, 어떤 풍경을 보고 이 순간은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사진과 나 사이에 지구력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다.
오촌기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마음속에 쑥쑥 들어오는데 유독 가을은 트렌치코트에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카페에서 그런 사색을 즐겨야 할 것 같은, 또 다른 한 손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시직 한 권 들고 있어야 ‘이게 가을 이제!’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일상에서 사진으로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며 오랫동안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