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인도 캘커타 여행기
사흘을 못 버티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일 버티게 된다면 3년은 더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 인도라 했다.
< 여행자의 독서 p.101 >
인도와의 인연은 참 운명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소와 버스라는 같은 운송수단이지만 도로 위의 아이러니 함이 공존했던.
45도가 넘던 날씨 속에서 뜨거움보단는 따뜻함을 느꼈던 그날을 회상해본다.
인도 여행을 가기 전
나는
유년시절 축구선수 활동을 하면서 너무나 당연히 대표팀이 되고 은퇴를 하는 평범한 삶을 그려왔다. 하지만 내게 찾아온 부상과 청소년 대표팀 탈락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평생의 꿈이던 축구대표팀 탈락으로 삭발을 하였고 본드, 담배, 오토바이 등 나의 생활은 점점 타락하게 되었다. 난 그게 타락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방황이었다. 나의 축구실력과 성실함의 부족을 탓한 것이 아니라 괜히 사회현상에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인생에 예정에도 없던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세우고 나니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열등감과 스트레스로 나 스스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늘 긍정적이게 생각했던 나의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삼수라는 긴 시간 끝에 남들 눈에 잘 보이기 위한 포장된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땐 대학만 오면 다 성공하는 줄 알았다.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니 왠 걸? 동기들이 너무 잘 산다. 누구네 아버지는 의사, 회사원, 외교관. 그저 우리 아버지는 소를 키우시고 농사를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워하시던 분이 작게만 느껴졌다. 나의 불만은 하늘로 찔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 이별한 후로 대인기피증이 걸렸다. 8개월간의 대인기피증으로 살이 급속도록 찌기 시작했고,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대인기피증을 극복하기 위해 우연히 시작했던 사진.
사랑했던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로 시작했던 사진을 통해 사람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서 대인기피증을 극복하고 있었다.
사진은 나에게 있어 '힐링'이 되어 주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인도를 여행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인도에서의 보름간의 여정은.
인생의 열등감, 불만이 많았던 나를 변화시켜주었다.
웨스트 벵갈의 아침.
각자 자신의 하루를 보내기 위해 분주하면서도 한가하다. 인도의 아침은 '짜이'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잊고 살았다.
아침 지옥철을 탈 때 언제부턴가 누군가와 살이 부대낄 때 너무 싫었다.
비가 축축이 내리는 날 버스 안에 사람이 많을 때 이유 없이 싫었다.
인도 사람들은 45도 폭염 속에서도 한 시간에 한 대지 나가는 트럭에 누군가 못타 아쉬워하면 양보를 한다.
그리고 기다려 준다.
난 언제부터 이런 배려를 잊고 살았지..?
여행을 하면서 사람 냄새와 이야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시장'이다.
하루 종일 걷다 보니 녹초가 되었다. 시장의 한 낡은 카페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고 있으니 금세 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뭘 까?라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매우 바쁘고 아등바등 살았다. 성공이란 단어에 집착을 하면서 남들에게 보이는 삶을 살아왔다. 진정함은 빈 껍질에 불과한 채... 내가 가진 게 적은 것은 불행한 게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점점 인도 여행은 일상을 탈출하는 느낌보단 또 다른 일상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행이기보다는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들의 삶 속에 스며 들다.
내가 지내던 웨스트벵갈의 SHIS 병원. 그리고 그 옆에는 두개의 학교가 있는데 SHIS 기관에서 운영하는 장애학교와 일반인 학교가 있다. 일반인 학교에 학급수는 70명이나 되지만 북적북적한 교실에서도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학교 학생들의 졸업앨범과 증명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3일간 사진 재능기부를 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날인 장애학교에는 부모님들도 함께 학교를 등교하게 되는데 그중 한 학생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살인적인 더위지만 학교를 가는데 4시간이나 걸어서 오는 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너무 놀랬다.
한 학생의 부모님은 말했다. 4시간의 도보는 거리의 초원, 동물들과 이야기하는 행복한 시간이지요. 그러나 제 아이에게 배고픔은 그 어떤 것으로 충족될 수 없는 가장 힘든 고통이에요. 앞으로도 저는 밥 한 끼를 위해 이른 아침 아이를 깨워 학교로 보내겠지요. 시계가 없는 지금 저는 도대체 몇 시인지 모르지만 밤하늘의 별이 및 나고 있으니 밤이 된 것 같네요. 오늘은 제 손으로 직접 만든 밥을 제 아이에게 하루 세 끼 먹이는 꿈을 꾸고 싶네요. 꿈속에서라도 눈물 날 정도로 행복한 시간 일 것 같습니다.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날 학교를 둘러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다.
웨스트벵갈에서의 6일째.
평생 느낄 더위를 압축폴더를 풀듯이 느끼고 있지만 아이스크림 한번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신기한지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해 뒤를 돌아보는 순가 엄청난 인파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앙~ 김태희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또띠"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뭐 만화 캐릭터 이름쯤 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숙소로 돌아와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엄청 웃으셨다.
약간의 벵갈어쯤으로 "저건 뭐야"라는 뜻이었다. 역시... 내가 특이하긴 특이한가 보다...-_-;;; 요 녀석들 내일은 괴롭혀야지
여행의 중반쯤.
문득 널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널 좋아하는 것 일까? 너도 떠나 보면 내 생각이 날까?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 길에 끝에 너가 있다면 좋을 텐데라는 헛된 마음이 날 붙잡고 있다.
'좋은 것을 볼 때 생각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래요'
그래. 아직인가 보다.
웨스트벵갈에서의 10일간의 일정은 끝이 나고 캘커타 시내로 넘어오게 되었다.
캘커타의 노란 택시가 나를 반겨준다. 여행은 이렇게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오랜 콜카타의 거리에는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가 오간다.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릭샤 역시 델리, 뭄바이에서는 보기 어렵게 된 교통수단이다.
캘커타로 향한 첫 날은 폭염이 쏟아졌다. 내가 느껴본 더위 중 최고였다.
마더 테레사 하우스 앞 뜨거운 땅바닥 아래 누워있던 가족.
가난하다고 해서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마음도 작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생각이 났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 이 만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이 날 응원해줬기 때문이다.
배응망덕하게 서울로 와보니 또 다른 사회 속에서 남들과 비교를 하게 되고 우리 부모님마저 미워 보였던 나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마더 테레사 하우스 Mother Teresa House
사진은 찍을 수 없었고, 봉사활동 보다는 내부 소개를 받았다.
세계 곳곳에서 마더 테레사를 생각하며 자원봉사를 하러 오는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인도 콜카타에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던 마더 테레사가 살았던 곳이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가 사용했던 방도 볼 수 있다.
마더 테레사 하우스는 월/수/금 봉사자를 받고 봉사자 오리엔테이션은 1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마더하우스에서 운영하는 7개 시설에 대한 소개를 듣고 한국 수녀님과의 상담을 통해 일할 곳을 배정받는 다고 한다. 봉사자들의 일상은 단순하다. 오전 6시 정도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30분에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숙소를 나선다. 걸어서 무슬림 거리를 지나 마더하우스에 7시쯤 도착하면 식빵 두 조각, 바나나 한 개, 차이(인도의 전통 차)로 아침식사를 하며 다른 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방문 가능 시간 : 오전 8시~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 (매주 목요일은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
캘커타에 있는 인력거
영화 ' 오래된 인력거 '를 보면 캘커타에서 인력거로 일하는 분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내가 만나본 인력거분은 참 웃으면서 일하셨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덥다고 짜증 한번 안 부리고 웃어주고, 참 인간적이셨다.
내가 훗날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 진 모르겠지만. 웃으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야?
낯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의 눈빛
나 또한 그들에 대한 호기심
이것이 여행의 즐거움
나는 인도에서
40도가 넘는 날씨에 자신도 모를 예민한 성격으로 까질 해졌을 수도 있죠.
우리는 인도에서 늘 알고 있던 상식이 뒤집히는 걸 보고 갸우뚱한 적도 있었죠.
우리는 인도에서 음식이 맞지 않아 화장실을 내방처럼 들락날락 걸렸을 수도 있죠.
하지만 난 인도에서
40도가 넘는 짜증에도 함께했던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는 배려심을 배웠고,
작은 구멍가게에서 사먹는 사이다 한잔에 너무 행복했었죠.
더운 날씨에 잠 못 이루었지만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꿈을 이야기하곤 했죠
밥 한 끼를 먹으러 4시간을 걸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눈 빛 속에서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죠.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이란 도시에서 벗어나 낮잠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죠.
우리나라보다 못 산다고 해서 가난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을
더운 날씨 속에서도 낮잠의 여유를
아픈 몸으로 병원 앞에서 줄 서 있던 그들은 그 기다림 조차 감사할 줄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인도 웨스트 벵갈에서
24살의 엄지가 엄지에게
인도에서 품고 느꼈던 마음을 평생 잊지 말고 열심히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