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지난 5.31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강유원 선생님이 진행한 수업을 듣고
-호메로스,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 민음사, 2022
-강유원, 《문학 고전 강의》, 라티오, 2017
두 책을 공부하여 나의 생각을 더해서 적어보았다. 고향에서 타향으로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서사시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서사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그 이유는 《오뒷세이아》의 서사가 서구 문명의 가치 세계를 정립하며 그 문화적 자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보자면 전쟁터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 과정이 쉽게만 이뤄진 서사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야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희랍의 서사시는 특히나 classical한 텍스트에 속하는데, 이런 고전 서사시를 읽기 전에 먼저 짚고 가야할 개념이 있다. 서사시란 대체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신들의 계보》에선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딸들인 9명의 무사(Muses, Mousai) 여신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예술(ars, tekhnē)에 해당하는 것들을 모두 아우르며 관장하고 있다. 여신들의 이름과 각 담당 영역은 다음과 같다. 클레이오(명성)-역사, 에우테르페-서정시, 탈레이아-풍요와 환성(희극을 가리킬 때 탈레이아를 말한다.), 멜포메네-비극, 테릅시코레-합창과 가무, 에라토-독창, 폴륌니아-찬가, 우라니아-천문(하늘의 이치, 조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사시를 담당하는 칼리오페가 있다. 칼리오페라는 말의 의미를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Beautiful-voiced, 즉 아름다운 음성이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무사 여신이 담당하는 예술(ars)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들의 자의식이 가득 투영된 예술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에 따라 칼리오페의 의미를 다시 이해해보면, 아름다운 음성은 미성이란 뜻 정도가 아닌 사람들을 파고드는 설득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오뒷세이아》의 1권 첫 부분을 보자.
한 사내에 대해 나에게 노래하소서, 무사 여신이여. 응변에 능한 자로
그는 많이도 떠돌았구나, 트로야의 신성한 도시를 정복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의 도시들을 보았고 그들의 성향을 알았지만
바다에서, 제 마음속 두루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자기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의 귀향을 얻으려 했거늘.
그렇게 애썼으나 전우들을 구하지는 못했구나,
그들 자신의 무도한 행위로 전우들이 파멸한 것이라
어리석은 자들, 천상의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서
포식하다니, 헬리오스가 그들의 귀향 날을 빼앗았구나.
_《오뒷세이아》 제1권, 1~10행
시인의 시의 여신인 무사에게 요청하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는 10행까지고, 11행부터 끝까지는 무사 여신이 시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이 서사시는 시인이 무사 여신에게 “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해서 무사 여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시인의 입을 통해 듣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렇듯 서사시를 관장하는 칼리오페가 사람을 파고드는 설득력을 의미하는 것은, 음유시인이 청중에게 이야기를 전하다보니 필요한 tekhnē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세계가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인도유럽어권에서 전승되던 영웅 이야기와, 기원전 2000년부터 발전한 에게해와 근동 지방의 세련된 문명을 들 수 있다. 서사시의 주요한 배경이 바다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엔 척박한 땅에서 살던 고대 희랍의 사람들이 바다로 진출하고 그에 이어 전반적으로 활발한 식민지 건설 활동을 했다. 이때 고대 그리스 고전 양식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근동 지방과 이집트 등에서 문물들이 유입되어 그리스 세계에서 금속공예, 조각, 건축, 도자기 등이 창조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함께 형성된 호메로스 서사시도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높은 수준의, 근동 지방의 문학을 수용하여 창조된 결과물일 것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야’라고 하는 낯선 세계가 배경으로 등장하며, 육지인 트로이아를 바다의 세력인 아카이오이 족이 침략하고 있다. 《오뒷세이아》에서도 그런 문명들의 충돌이나 혼합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라고 하더라도 두 작품의 주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신들의 대리전 같은 인상을 주던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뒷세이아》는 신들의 역할이 주요한 힘으로서 등장하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뒷세이아》는 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보여준다.
모든 서사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호메로스를 포함한 고전적 텍스트들은 대체로 In medias res라는 서술 방식을 선택한다. In(안으로), medias(가운데), res(사건, thing), 즉 ‘사건의 한 가운데로’라는 의미이다. 《오뒷세이아》로 예를 들어보자면, 오뒷세우스의 서사시인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오뒷세우스가 태어나며 죽을때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오뒷세이아》는 20년 동안 있던 일을 40일 정도로 압축했고, 결정적 계기를 중심으로 핵심적인 부분만 서술한다.(1-8권 10년, 9-12권 10년, 13권 이후 며칠 : 10년간 일어난 일과 며칠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분량이 거의 동일하다.) 이 며칠간 일어난 사건이 오뒷세우스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부분이 되는 것이다.
In medias res는 특정한 단면을 자르는 서술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서술 방식에선 부분이 전체를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고전적 텍스트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5막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뒷세이아》의 “차례”를 보며 이야기 해보자.
[1] -텔레마키아 tēlemacheia : 텔레마코스(오뒷세우스의 아들, 젊은 날의 오뒷세우스를 표상)의 이야기
고향
제1권 신들의 회의 후 아테네가 텔레마코스를 격려하다.
제2권 이타케인들의 회의_텔레마코스의 출항
타향
제3권 퓔로스에서 있었던 일들
제4권 라케다이몬에서 있었던 일들
[2] 타향에 있는 오뒷세우스: ‘오뒷세우스의 모험’으로 알려진 부분(advent, adventure)
오뒷세우스의 사실적 경험(factual)
제5권 칼륍소의 동굴_오뒷세우스의 뗏목
제6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가다
제7권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에게 가다
제8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머물다
환상세계에서 오뒷세우스가 겪은 일들(fantastic)
제9권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들_퀴클롭스 이야기
제10권 아이올로스_라이스트뤼고네스족_키르케
제11권 저승
제12권 세이렌 자매_스퀼라_카륍디스_헬리오스의 소들
[3] 고향에 돌아온 오뒷세우스
오뒷세우스의 귀향과 텔레마코스의 알아봄
제13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를 떠나 이타케에 도착하다
제14권 오뒷세우스가 에우마이오스를 찾아가다
제15권 텔레마코스가 에우마이오스에게 가다
제16권 텔레마코스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
[4] 오뒷세우스의 복수와 페넬로페의 알아봄
제17권 텔레마코스가 시내로 돌아가다
제18권 이로스와의 권투시합
제19권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와 대담하다_세족(洗足)
제20권 구혼자들을 죽이기 전에 있었던 일들
제21권 활
제22권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죽이다
제23권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
오뒷세우스의 아버지 라에르테스(노년의 오뒷세우스를 표상)
[5]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
고전 텍스트의 ‘5막 구조’에서 [1]하고 [5]는 늘 연결된다. 원환, 수미일관한 구조를 그린다. 맨 마지막 부분이 에필로그일 수 있으나 그 결말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이런 구조의 원형이 《오뒷세이아》이다. 《오뒷세이아》의 결론은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로 끝나지 않고, 오뒷세우스는 다시 아버지를 만나러 저승으로 길을 떠난다.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부분 까지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의 주제는 ‘쓸쓸함’이다. 비극이란 장르는 서사시의 “결정화”인데, 이는 불행한 이야기라 비극이 아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가 계속되고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나기에 비극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앎이라는 것을 인간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성한 영역으로 여긴다. 무언가 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안다는 것인데,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이것은 비극이다. 《오뒷세이아》라는 서사시도 “저승 속편-맹약”이 있음으로써 오뒷세우스가 알 수 없는 길을, 인간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떠나기에 비극과 닿아있다.
위 “차례”를 보고 《오뒷세이아》를 읽어보면, 주인공인 오뒷세우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멀리 떨어진 싸움꾼’이란 이름을 가진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권부터 제4권까지를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라 하여, ‘텔레마키아’tēlemacheia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타케의 위기 상황이 그려진다. 트로야를 정복한 오뒷세우스는 아직 귀향하지 못한 상태인데, 구혼자들이 오뒷세우스의 궁전에 몰려들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먹어치우고 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의 무도한 행위를 제지할 힘이 없다. 텔레마코스는 이름 그대로 ‘멀리 떨어진 싸움꾼’이다. 이는 그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전장에 있지는 않으나 싸움을 하는 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서사시 뒷부분에선 그가 집안에 들어온 구혼자들과 다투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제1권 “신들의 회의 후 아테네가 텔레마코스를 격려하다”에서 “격려”는 집을 나가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제2권“이타케 인들의 회의_텔레마코스의 출항”까지는 텔레마코스가 고향에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제3권과 제4권은 타향에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고향’과 ‘타향’이라는 두 장소가 등장하는 것은 경험의 영역이 두 군데라는 것을 의미한다. 텔레마코스가 고향을 떠나 타향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변증법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다. 변증법이라함은 pathos(passion 열정, 고난)가 더해지는 것이다. 고향에서의 pathos에 타향에서 고난을 겪은 pathos가 더해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구도는 즉자, 대자, 즉자-대자의 변증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다, 다시 돌아와서 보는 고향은 떠나기 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익숙한 곳을 떠나지 않고, 자기 자신에만 파묻혀 있어서는 고착화된 상태로 남아있을 뿐이고, 이를 부정하고 또 매개하는 부단한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고통스럽다. 오뒷세우스의 타향살이가 괴로운 것은 타향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자기 객관화’에 이를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고통스런 경험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재구성되는 과정이기도 해서이다. ‘나’라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자아 I가 각각의 낯선 것을 대면하는 자아 I’와 I=I’의 정립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제3의 자아인 I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자아 I가 경험을 통해 자기운동(Aktus)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말을 어렵게 했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10살의 나와 20살의 나와 현재의 나는 모두 같은 ‘나’지만 그 내용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앞서 말했듯 경험의 과정은 부단하고 고통스럽다. 이런 고통스러운 부분이 오뒷세우스의 여정에서 가감없이 드러나는데, 타지에서 오뒷세우스는 지상의 낯선 곳은 물론이고 환상 세계, 저승 세계까지 가게 된다. 흔히 ‘오뒷세우스의 모험’(제5권~제12권)이라고 알려진 이 부분을 그저 ‘모험’이라고 말해버리면 사실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온갖 낯선 것을 겪는 여정이 가진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모험이라는 말은 영어로 adventure인데, 이 말의 어원은 advent라는 라틴 어이다. 라틴 어에서 이 말은 ‘도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말의 명사형인 adventus는 기독교에서 대림(待臨)절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함축되어 있는 말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오뒷세우스의 모험’보다는 ‘오뒷세우스의 고난’이라는 말이 더 의미를 잘 전달할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고난이다.
오뒷세우스의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제9권은 오뒷세우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이유는 앞서 제8권에서 파이아케스 족의 왕 알키노오스가 아래와 같이 물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말해주시오. 그곳에서 모친과 부친이 그대를 부르고
도시에 사는 이들과 주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
나에게 그대의 땅과 지역과 도시를 말해주시오,
[…]
그대는 어떻게 떠돌다가 인간들의 어느 땅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살기 쾌적한 도시들과 인간들에 대해서 말해주시오,
[…]
아르고스인들과 다나오스인과 일리오스의 불행한 운명을 들었을 때,
왜 그대가 눈물 흘리며 속 깊이 애통한지도 말해주시오.
_《오뒷세이아》 제8권, 550~579행
알키노오스의 물음들은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다. 먼저 그는 오뒷세우스의 “이름”을, 그에 이어 “땅”, “지역”, “도시”를 묻는다. 더 나아가 “어느 땅에 도달했는지”, 삶의 역정을 묻고 마지막으로 “마음속”도 묻는다. 이러한 것들은 오뒷세우스의 모든 것을 묻는 것이다. 즉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오뒷세우스는 답한다.
지금 우선 내 이름을 말하리다, 여러분이 알 수 있도록,
나는 저 무자비한 날로부터 도망쳤으니
여러분의 손님일 것이오, 비록 먼 곳 집에 살더라도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요. 온갖 술수로
사람들 주목을 받아서 내 명성은 하늘에 닿았소.
_《오뒷세이아》 제9권, 16~20행
오뒷세우스는 “나”라는 말을 써서 대답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앞서 알키노오스가 물어본 것들에 대해 모두 말한다. 그것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처럼 ‘나’에 관한 이야기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초월적 자아(자기의식)는 무(無)로 규정될 수 있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자기운동을 함으로써 정립되는 행위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나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기 위해선 항상 동일한 내가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나다.”라는 말은 사실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을 것이다. ‘나’라는 자아는 늘 경험의 문맥을 그 안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정신으로 가져와서 그것들을 묶어서 이야기한다. 나의 정신으로 가져오는 것은 ‘반성’(反省)이고, 그것을 서술하면 자기 서사가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런 오뒷세우스의 “서사”속에 변증법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증법은 형태와 개념을 분리한다. 개념은 ‘전제’된다. 여기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전제되는 것이다. 현재의 개념을 전제하고 그것을 과거로부터 끌어와 파악한다. 여기서 ‘나’라는 추상성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고, 그 각각의 경험의 계기를 파악할 수 있다. 각각의 계기는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같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진리이다.
제13권은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를 떠나 이타케에 도착하다”이다. 이타케는 오뒷세우스의 고향이다. 여기서 오뒷세우스는 또 고난을 겪게 된다.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아내인 페넬로페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사실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가 서로를 확인하고 승인하는 장면은 비교적 간단하게 이뤄진다. 하지만 아내인 페넬로페와는 지난한 의사소통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제19권의 제목은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와 대담하다_세족(洗足)”인데, 제목과는 달리 페넬로페는 아직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뒷세우스 못지 않게 페넬로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는게 중요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오뒷세우스의 진정한 귀향이 성취되고, 변증법적으로 매개를 이뤄내 진정한 자기 내 복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페넬로페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신중한”(periphrōn)이다. 신중한 사람은 사태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힘을 가졌다. 여기서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에게 인정받기 위해선 또 한차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나 페넬로페가 묻는다.
그렇게 말하자, 에우뤼노메는 잽싸게 반들반들한
의자를 가져와서 내려놓고 그 위에는 양피를 올려 덮었다.
그곳에 많이 참는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앉았다.
둘 가운데 신중한 페넬로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그네여, 내가 먼저 직접 그대에게 이걸 묻겠소. 인간들 중
누구고 어디서 왔나요? 그대 도시는 어디고 부모는 어디에 있나요?
_《오뒷세이아》 제19권, 100~105행
이것은 지금까지 오뒷세우스가 여러 차례 받았던 질문이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는 곧바로 자신의 이름과 도시, 부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뒷세우스 역시 페넬로페를 아직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 살해당한 아가멤논의 경우를 떠올린 오뒷세우스는 충분히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한다. 아직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를 들은 페넬로페 역시 자신이 괴롭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처지를 서로 확인하게 된다.
남편이 너무 그리워서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다오.
_《오뒷세이아》 제19권, 136행
여기서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가 가진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된다. 페넬로페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당신의 혈통과 출신을 내게도 말해주세요.
옛 전설이 말하듯 바위나 떡갈나무에서 태어나진 않았겠죠.
_《오뒷세이아》 제19권,162~163행
오뒷세우스는 이번에도 자신이 오뒷세우스임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자신이 오뒷세우스를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오뒷세우스가 판단하길,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페넬로페는 다시금 묻는다.
이제는, 나그네여, 당신을 시험해볼 생각이오,
당신 말대로 정말로 당신이 그곳에서 신과 같은
전우들과 함께 궁전 안에서 내 남편을 접대했는지.
내게 말해보시오, 그이가 몸에 어떤 옷을 걸치고
그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 그의 전우들에 대해서도.
_《오뒷세이아》 제19권, 217~219행
이것은 겉모습을 식별하려는 질문이다.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가 분명히 알 만한 것들을 증거로 들어 말한다. ”자주빛 외투“, ”황금으로 만든 브로치“가 그것이다. 페넬로페는 그것을 듣고 그가 만난 사람이 오뒷세우스임을 확신한다. 거듭된 의사소통속에 두 사람의 확인이 가까워지고 서로의 지평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페넬로페는 시녀들에게 그의 발을 씻어주고 잠자리를 살펴주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을 씻는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의 발을 씻기는 시녀는 그의 유모였던 에우뤼클레이아이다.
노파가 다가와서 주인의 발을 씻기고 있었다. 당장
흉터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멧돼지가 흰 엄니로 공격해 생겼는데
과거 오뒷세우스가 파르낫소스에 아우톨뤼코스와 그 아들들을
만나러 갔을 때 일이다. […]
_《오뒷세이아》 제19권, 392~395행
유모가 발을 씻기며 흉터를 알아보는 사건은 이 서사시가 오뒷세우스의 삶 전체를 다루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흉터는 오뒷세우스의 유년기에 있던 사건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유모가 흉터를 알아본 것을 눈치챘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 누더기로 덮었다.
제23권의 제목은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이다. 페넬로페는 자신을 괴롭히던 구혼자들을 죽인 오뒷세우스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다시금 페넬로페는 진정한 확인을 하기 위해 담담하게 말한다.
신중한 페넬로페가 그에게 말했다.
“이상한 남자여, 나는 전혀 자만하지도 무시하지도
많이 놀라지도 않아요. 아주 잘 알고 있죠. 당신이
이타케에서, 노가 긴 배 타고 떠날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럼, 자, 이분에게 잘 짜인 침상을 펴드리게나, 에우뤼클레이아,
잘 지은 침실 바깥에, 그분이 직접 만든 침상을 말이다.
그곳에 침상을 내다놓고 그 위에 침구를,
양털과 덮개와 번쩍이는 담요를 올려놓게나.”
_《오뒷세이아》 제23권, 173~180행
페넬로페가 담담히 말한 이유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들은 오뒷세우스는 “역정”을 내는 것이 당연했다.
“부인, 그말은 정말로 마음에 상처가 되는구려.
누가 내 침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니? 그리할 방법을
잘 아는 자라도 어려운 일이오. 신이 몸소 와서는
자기 의지로 쉽게 다른 장소로 옮겨놓는다면 모를까.
_《오뒷세이아》 제23권, 183~185행
화가 난 그는 침상을 만들었던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상세한 그의 이야기에서 침대가 이 서사시에서 중요한 징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나무의 기다란 몸통이 영지 내에 있었는데
잘 자라서 울창했소. 그 나무는 기둥만큼이나 두꺼웠지.
그 나무 몸통 주위에 내가 빽빽한 돌들을 사용해
침실을 지어 완성했고, 그 위에 지붕을 잘 덮고는
꼭 맞게 연결되고 단단히 짜 맞춘 문들을 붙였소.
그러고 나서, 이파리 긴 올리브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밑동을 뿌리에서 위로 자르고 청동 도끼로 솜씨 좋게
매끈하게 잘 다듬고 먹줄을 쳐서 곧게 하여
침대 기둥을 만들고, 송곳으로는 모든 곳에 구멍을 뚫었지.
밑동에서 시작해 침대를 완성할 때까지 꼼꼼하게 작업했는데
기술 좋게 금과 은과 상아로 장식하며 말이오. 이 침대 틀에는
자줏빛 반짝이는 소가죽끈을 십자로 엮어서 당겨놓았소.
이것이 그대에게 보여준 증거요. 그러나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오.
날 위해 아직도 침상이 굳건한지, 부인, 아니면 어떤 사내가
올리브나무의 밑부분을 잘라내서 다른 곳에 옮겼는지.”
_《오뒷세이아》 제23권, 190~204행
이렇게나 상세하게 침상을 만든 과정과 모습을 말한 것은 페넬로페에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증거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지난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쳐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징표들이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삶 전체를 담고 있는 침대가 나타나게 된다. 비로소 같은 지평을 공유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화는 때때로 고통스런 과정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과정 속에 불행을 이야기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의심을 하고 비로소 서로를 확인한 것처럼, 서로를 일치시키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겪은 끝에 오뒷세우스를 알아차린 페넬로페는 무릎과 심장이 풀리고, 눈물 흘리며 곧장 달려가 오뒷세우스의 목 주의에 양 손을 뻗고는 입을 맞춘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고난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오뒷세우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여보, 아직은 우리가 모든 시련의 끝에 도달한 게
아니니, 이후에도 측량할 수 없는 과업이 있을거요.
그것은 많고 어려운 과업으로, 내가 반드시 이뤄야 하오.
그렇게 테이레시아스의 혼령이 내게 예언했는데
내가 하데스의 집 안으로 내려가서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모색하려 했을 때요.
자, 침상으로 갑시다, 부인, 이제는 잠자리에 누워서
달콤한 잠을 즐길 수 있도록 합시다.
《오뒷세이아》 제23권, 248~255행
인간의 삶이란 이렇다. 끝없는 고난이 이어진다. 변증법을 삶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운동하지 않고 고착되는 것,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시간성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끝없는 고난으로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