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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협 Feb 27. 2024

알베르 카뮈의『이방인』읽기

카뮈의 "부조리" 개념과 문학론을 토대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도 위의 구절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본서의 역자인 김화영은 “『이방인』은 작품 그 자체로 보나 20세기 서사 형식의 역사에  있어서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품으로 출판 당시부터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라 고 평한다. 사실 이 소설의 문학적 지위를 가늠해 보는 데에는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의 주요 저작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현재 전 세계에서 101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적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쓰인 소설이 아닌, 카뮈의 철학이 소설로써 현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카뮈의 또 다른 저작인 『시지프 신화』를 경유해보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1. “부조리”란 무엇인가? 


『시지프 신화』(이하 『신화』)는 카뮈의 저작 중 부조리 3부작에 속하는 작품이며, 철학 에세이의 형식으로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드러낸다. ‘부조리 철학’이란 말이 생소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부조리’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카뮈가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부조리’는 명료한 인간의 의식이 비합리적인 세계와 마주칠  때, ‘왜?’라는 의구심이 드는 그 순간,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상태이다.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 날 때 느껴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한다. …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다. 각성 끝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과가 생기는 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원상 복귀일 수도 있다. (『신화』 p30)


 또한 부조리는 다가올 확실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바라는 인간의 모순적인 상황, 당연한 듯 존재했던 세계관의 붕괴 속에서 느끼는 낯선 세계의 모습과도 이어진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신화』 p31)


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섦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 한동안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 습관에 의해 가려 있던 무대 장치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신화』 p32)


 또한 동시대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저작인 『구토』에서 이어지는 ‘구토 nausée’의 개념과도 이어져 있다.


인간 자신의 비인간성 앞에서 느끼는 이 불안, 우리의 됨됨이가 보여 주는 이미지 앞에서 경험하는 측량할 길 없는 이 추락, 우리 시대의 어느 작가가 말한 바 있는 ‘구토(嘔吐)’ 이것 또한 부조리다. (『신화』 p32)


 만약 한 인간이 종교적 기반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러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에 그 뿌리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도, 이 글을 읽는 우리들도 한 차례 신의 품에서 벗어난 “근대인”으로 규정되기에, 필연적으로 "부조리"를 대면한다. 근대에 접어들어 인간은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던 대지로부터 분리된다. 모든 신분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누리지만, 너무나 자유로운 나머지 그 자유로 인해 기존의 모든 사회적 관계,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던 모든 가치체계 등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따로 존재하게 된다. 모든 단단했던 것이 녹아내린 이때,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도 명확한 의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내 세계를 명확히 이해하려는 인간의 의식과 비이성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둘 사이에서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 역설적으로 우리가 무언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바로 부조리이다. 오직 ‘부조리’만이 명확하지만, 이런 상태에 빠진 인간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앞서 말했듯 어떤 종교의 기반 위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끝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는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한다. 부조리함은 자명한 것인데, 그렇다고 자살을 해야할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신화』 p15)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 그 물음에 답하려고 애쓴 대다수의 사람은 처음엔 논리적이다가도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카뮈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명함으로 부조리를 추론하려 시도한다.     


집요함과 통찰이야말로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를 구경하는 특권적 관객들이다. (『신화』 p25)


 카뮈의 통찰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명함’이다. 카뮈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들을 마치 알듯이 이야기하고, 믿어선 곤란하다고 여긴다. “비약”이란 말로 이야기되는 ‘신’ 혹은 ‘종교’가 그렇고, 심지어는 과학에서도 그렇다. “이 세계의 법칙들을 열거하고”, “세계의 메커니즘을 분해하고”, “멋지고 알록달록한 우주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원자 자체는 전자로 환원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종국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태양계 유성군 얘기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전자들이 어떤 핵 주위를 회전한다고 설명한다.”고 한다. 이 시점부턴 이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카뮈의 표현을 따르면 이것은 시(時)에 도달한 것이라 한다. 이것은 카뮈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조차도 그에겐 ‘자명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신화』를 읽어나가면 알 수 있듯 카뮈에게 자명한 것은 ‘부조리’와 인간이라면 언젠간 맞이하게 될 ‘죽음’뿐이다. 이 두 자명함을 쥐고 집요하게 통찰을 이어간다. 앞서 이야기했듯 ‘부조리’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다. “명료한 인간의 의식”과 “비이성적인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부조리는 각 항의 대립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두 개의 항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항의 대립 역시 사라질 테고 ‘부조리’ 역시도 소멸하고 만다. 하지만 ‘부조리’를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명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와 내 삶의 관계를 조절하는 부조리를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하여 이러한 확신들을 지켜야 하며, 이 확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지탱해야 마땅할 것이다. 특히 나는 이 확신들에 따라 나의 행동을 조절하며 모든 결과에 있어서 그 확신들을 밀고 나가야 한다. (『신화』 p41)     


 ‘종교’는 불가해의 영역에 ‘비약’을 시도함으로써 ‘부조리’를 마주하는 것이 아닌 뛰어넘어 버리고 만다. 또 ‘자살’은 ‘부조리’를 해소하긴 하나 그것은 한계점에 이르러서의 수용일 뿐, ‘부조리’를 마주 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카뮈가 제시하는 방법인 ‘반항’만이 그 ‘자명함’을 견지한 채 남아있게 된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신화』 p83)     


 이런 전제 속에서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앞서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자명함’인 ‘부조리’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인간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거라는 것과 언젠가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중요하고 나머진 중요치 않다. 따라서 두 ‘자명함’을 제외한 모든 경험의 가치는 동등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경험을 대하는 기준은 질(質)의 추구가 아닌 ()의 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선 그것들을 최대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그 기회를 남김없이 소모하며 살아야 한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핀다로스, 「아폴로 기념 경기 우승자에게 바치는 축가 3」


 이렇게 『신화』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글이지만, 그 내용을 따져보면 말하려는 바는 단순하다. 카뮈를 비롯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힘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아마도 이성을 따라 끝없이 나아가던 인류가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한 탓에 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을 참고하여 카뮈를 독해했을 때, 카뮈가 왜 이성을 통해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을 중지하였는지에 대하여 적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카뮈의 문학론


 카뮈의 문학론은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산재해 있다. 세 권의 『작가 수첩』을 비롯해 많은 인터뷰 등을 통해 카뮈의 문학론을 엿볼 수 있다. 카뮈가 문학에 부여하는 의미는 반항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인간’과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한때 향유했지만 ‘잃어버린 통일성’의 회복으로 보인다. 카뮈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학위 논문 역시도 고대 희랍의 형이상학에 관한 내용으로 쓰여져 있다. 그에 따라 카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오히려 세계의 일부로 간주된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 유일한 세계란 다름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自然) 바로 그것이다. (『결혼』 p.67)     


 인간은 세계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다시금 인간-세계의 통일성이 실현될 수 있다. 인간-세계의 합일, 즉 ‘결혼’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삶의 충일, 행복 등이 가능해진다. ‘내’가 ‘세계’와 하나일 때, 나는 이 세계와의 결혼 첫날의 나른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 카뮈의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는 항상 조화와 화해, 즉 통일성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다. 그 두 항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부조리’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이혼, 즉 절연이다.” 그것은 곧 두 항 사이의 통일성이 와해되었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그 원초적 적의(敵意)이다. 무관심, 비합리의 덩어리인 세계 앞에서 인간은 ‘부조리’의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세계의 모습에 직면해서도 이 세계와의 ‘절연’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그의 의식이 일상생활에 매몰되어 마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인간이 ‘절연’을, ‘부조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삶이 질적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조리’는 느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그가 마냥 ‘부조리’에 사로잡혀 절망하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카뮈는 『신화』에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자살’, ‘종교’, ‘반항’이 그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 보았듯이, 자살과 종교는 ‘부조리’를 극복하는데 있어 진정한 방법이 될 수 없다. 두 항의 대립을 무너뜨려 ‘자명함’을 소멸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뮈는 ‘반항’을 진정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앞서 요약한 『신화』의 귀결에 따르면 ‘반항’은 ‘부조리’를 마땅히 견지해 나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부조리를 형성하는 두 항의 재결합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반항’은 인간이 세계를 움켜쥐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열망이다. 또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다. (돌이 다시금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정을 오르는 시지프를 상상해보라!) 서로 대립하는 두 항이 통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의아할 수 있겠지만, 두 항은 상호의존적이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타자로 존재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삼위일체는 붕괴되고 ‘자명함’은 이내 소실되고 말 것이다. 바닥이 없는 절망 속에 ‘부조리’가 낳은 죽음충동이 ‘자살’과 ‘비약’을 원하게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함께하는 그 지점에서 성립하는 것, 이때가 되어서야 ‘부조리’는 하나의 견지해야할 ‘자명함’이 되어 죽음충동을 해소하고 ‘자유’와 ‘열정’을 누리는 ‘부조리’한 인간을 태어나게 한다.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해소된다.”


 따라서 반항은 결국 인간이 이 세계와의 화해, 합일, 곧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카뮈에게서 반항이 겨냥하는 목표는, 그가 문학을 통해 겨냥하는 목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카뮈는 문학을 이 세계와의 재화해, 와해된 통일성 회복을 위한 유력한 기제(基劑)로 규정한다. 문학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실현되었던 통일성을 회상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단절된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반항’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뮈에겐 문학 자체가 절대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카뮈에게 있어서 절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세계의 합일, 결혼, 통일성이다. 


전라(全裸)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육체적 자유의 의미를, 손과 꽃들 사이의 일치를, 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대지 사이의 저 연인 사이와도 같은 공감(共感)을 담고 있다. 아! 그 공감이 이미 나의 종교가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그쪽으로 기꺼이 개종(改宗)하리라! (『결혼』 p.63)


카뮈에게 있어 ‘공감’은 절대이자, 종교이다. 요컨대 카뮈에게 문학은 이러한 인간-세계의 합일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유력한 기제인 것이다.


3. 『이방인』     


 앞서 이야기한 ‘부조리’ 개념의 규정과 그 철학, 그리고 카뮈의 문학론을 토대로 삼아 『이방인』을 읽어보려한다.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이방인』과 『신화』의 출간 순서에도 의미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이 아니라 소설이 ‘먼저’ 나왔다는 사실로부터 “위대한 소설가들은 원칙이나 개념이 아니라 감각적 외양으로, 즉 이미지로 글을 쓴다”는 카뮈의 신념을 읽어낼 수 있는 점이 그것이다. 부조리의 개념과 감정은 다른 것이며, 『이방인』은 구체적인 체험이 감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이고, 이후에 발간된 『신화』는 소설에 그려진 부조리의 “풍토”를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사태를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태를 살아 내고 있는 주인공 뫼르소의 “명석한 의식”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단순히 부조리의 개념을 뫼르소라는 인물에 ‘대입’시킨 것으로만 이해해선 곤란할 것이다. 이 점을 견지하며 소설의 내용을 우선 알아보자.


 『이방인』은 그 분량이 많지 않은 만큼, 큼직한 사건 몇몇을 간략히 다루었다는 인상을 준다. 1부의 시작에서 뫼르소는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장례식을 치르고 그 다음날 전 직장에서 알던 ‘마리’라는 여자를 만난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 ‘레몽’과 친해지고, 그의 친구의 초대로 마리와 뫼르소, 레몽은 레몽의 친구 부부가 있는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유난히 덥고 태양이 내리쬐던 그 날, 레몽의 전처 사건으로 인해 그를 노리던 아랍인 무리와 마주치게 된다. 다툼이 있고난 후 혼자 해변을 걷던 뫼르소가 다시금 아랍인 중 한명을 마주치게 된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뫼르소는 아랍인을 향해 한 발, 다시금 네 발의 총을 발사한다. 2부에선 앞선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펼쳐진다. 종국엔 뫼르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사제가 뫼르소를 찾아와 기도를 하겠다고 하자 뫼르소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주인공인 뫼르소의 언행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작가의 통제안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상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볼때, 뫼르소는 카뮈의 규범에 따라, ‘부조리’의 은총을 입은 인물로 상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죽었지만 슬퍼하는 티를 내지 않고, 마리와 함께하지만 마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진 않으며,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심문이 진행되는 과정속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요컨대 뫼르소는 산만하고, 분산되고, 부유하고, 침묵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뫼르소를 무정한 인간으로 단정 지을 순 없다. 이 소설의 시작이 되는 어머니의 죽음, 그 이후로 『이방인』의 1부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뫼르소의 모습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얼핏 무정해보이는 그의 태도는 어머니의 죽음 그 이전의 습관, 일상생활이 지배하던 삶이 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세계관은 깨어진 상태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뫼르소는 마리를 만나고, 다음날 발코니에서 무료한 하루를 보낸다. 이때 그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이제 여느 때처럼 셀레스트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러 질문을 할 텐데 나는 그게 싫기 때문이다.”(『이방인』 p.31) 어머니가 양로원에 간 지 3년이 지났음에도 ‘이제’ 아파트가 그에게는 ‘너무’ 커 보인다고 말한다. 살라마노 영감이 개를 잃어버린 후 그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뫼르소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의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러다가 벽을 통해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엄마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이방인』 p.54)      


 위와 같은 근거에서 뫼르소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단순히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이란 사건이 뫼르소의 세계에 낯섦을 주는 계기임을, 그로인해 화자인 뫼르소의 이야기가 그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부의 6장은 세 가지 ‘죽음의 장’들(장례식, 살인, 사형 선고) 중에서 죽음이 현실적인 사건으로 서술되고 있는 부분이다. 살인은 네 번의 총소리,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이방인』 p.78)에 불과하다. 이 죽음은 『이방인』의 거울 구조를 드러내는 지표로 기능한다. 1부는 뫼르소가 맞이한 일련의 사건을 서술하고, 2부는 1부에서 서술된 일들을 인간의 합리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과 세계의 분리인 ‘부조리’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능란한 구성이다.” 


 살인 사건으로 마감되는 이 장의 중심에는 공격적인 태양이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때도 태양빛은 강렬하게 내리쬐었지만, 모든 것을 액화시켜 끈적한 환각을 보여주던 그 때와는 다르다. 사물을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물질을 쇠붙이로 변화시키며, 바다는 칼이 되고, 모래는 강철이 되어 끝내 행동은 살인이 된다. 


 2부에 들어서 앞선 살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다. 뫼르소는 명확한 의식을 가진 ‘부조리’한 인간이다. 그에게 있어서 견지할 수 있는 ‘자명함’ 외의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 전반에 되풀이 되는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표현에서 그 의식이 드러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냉정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하여, 변호사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뫼르소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2장에서 뫼르소는 “감방이 내 집”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삶이 “그 속에서 멈추어버렸다는 것”(『이방인』 p.92)을 느낀다. 그 후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사형)을 더 분명히 느끼는 듯 하다.     


그때 나는 엄마의 장례식 날, 간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의 저녁들이 어떤 것인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이방인』 p.103)     


 이내 4장에서의 ‘사형 선고’로 이 ‘죽음’은 확신으로 임박해온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인간은 마치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에 더 가까이 가는 내일을 바라곤 한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고 대부분 인간들에게 막연한 채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더이상 죽음은 막연한 위협이 아니게 된다. 마지막 5장에서 부속 신부가 ‘사형수’ 뫼르소를 찾아온다. 신부가 기도하겠다고 말하자 뫼르소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말한다.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이방인』 p.150)      

뫼르소는 자명한 진실을 견지하며, 진실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의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이방인』 p.150) 

    

 소설 전반에 걸쳐 섬처럼 고립된, 끊어지는 단문들로 서술하던 화자 뫼르소는 이 부분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장황한 서술을 한다. 미래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어두운 바람”은 뫼르소의 의식 속에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된 죽음의 바람이다. 이 바람이 모든 가능성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것은 ‘부조리’한 인간의 태도이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뫼르소는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부조리’를 견지하고 그 태도를 획득한다. 1부의 일상적 내용을 2부에서 인간들의 ‘합리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도 끝내 가까워질 수 없는 ‘부조리’, 그로인해 섣불리 ‘부조리’를 해소하려는 인간들은 진실이 아닌 것의 강요를, 종교의 강요를, 종국엔 사형 선고를 하게된다. 앞서 『신화』를 읽으며, 카뮈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카뮈의 문학론을 보며 카뮈가 소설(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규명한 바 있다. 그에따라 『이방인』의 의미를 살펴보면 한 인간이 일상생활의 붕괴를 맞이하여 세계의 낯섦과 조우했을때, 피할 수 없는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그에 대한 답변으로 진실을 견지하며 자유와 열정을 얻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소설을 인간-세계의 공존을 위한 기제로서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직성의 모럴을, 세상을 사는 기쁨에 대한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찬양을!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 p.153)     


 인간은 모두 ‘사형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죽음’, 그에 대한 확신은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할 때 역설적으로 ‘자유’와 ‘열정’을 얻는다. 필연적인 ‘부조리’를 대면했을 때 삶은 의미가 없으니 자살한다는 결론이 아닌, 한정된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초연함과 열정의 실천은 삶의 찬란함과 무용함을 완성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 참고한 책들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이방인>>, 책세상, 202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시지프 신화>>, 민음사, 201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결혼·여름>>, 책세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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