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기를 무사히 마치고

연남에서의 세 번째 만남

by 캐롤

가을이 이렇게 짧았던가.

찬 바람이 옷 사이로,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요즘이다.

카페 일기와 어김없이 가을 절기를 지나 겨울의 문턱에서 다시 일기를 썼다.

땅이 차가워지기 전이라 그런지, 가을을 지나 작물이 참 풍성했다.

돌아보면 매 계절이 그랬다.

더웠지만 작물이 많았고, 추웠지만 또 작물이 많았다.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했지만, 다음 계절 생명수가 하늘에서 내린다.

식재료를 주욱 나열하고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따뜻한 수프와 밥을 올리기로 했다.

메뉴를 구성하다 보니, 문득 내가 자주 보는 일본 드라마가 떠올랐다.

나는 평소에도 같은 영화, 같은 음악, 같은 드라마, 같은 책의 구절을 반복해 읽는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기분의 높낮이가 비슷한 나는, 한번 좋았던 기억은 오래 품고 가는 편이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

(パン と ス-プ と ネコ日和)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엄마와 단둘이 지내던 아키코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과 일하던 출판사의 불합리한 인사이동으로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엄마가 운영하던 작은 식당을 리모델링해 샌드위치와 수프만 내는 소박한 가게를 연다.

그녀의 앞에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족이 되고,
이웃과 동료, 함께 일하는 직원과 손님들, 그리고 가족의 오래전 이야기까지—
각자의 시간이 조금씩 얽혀 아키코의 일상의 시간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린 소설 원작의 드라마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 지나갔습니다.

절대 붙잡을 수는 없지만, 문득 돌아보면 언제나 곁에 머물러 있는 것도 결국 시간이지요.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수치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결처럼 흘러가는 흐름일 뿐이지만,

결국 삶은 흘러 흘러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것 같다.



겨울 접시는 이러하였다.

part 1.

삼년번차

찐 토란과 미소 드레싱


발효 커리와 템페 키마커리, 백팔미

무화과 샐러드, 우메보시 드레싱

매실 장아찌

유자 무 절임

밤 바스크 치즈 케이크


part 2.

삼년번차

찐 토란과 미소 드레싱


무화과 노루궁둥이 버섯 샌드위치

삶은 유정란

시오코지 당근 절임

두유 그릭

착즙 주스


겉모습은 작지만 알차고 핵심적인 내용이나 사람, 물건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알토란' 같다고 한다.

불로치 농원에서 구매한 토란은 알찬 밤처럼 동글동글 잘 여문 것이 왔다.

쪄서 한 김 나가면 쫀득쫀득한 맛이 좋다.

우메보시나 미소를 곁들여 따뜻한 차와 함께 먹으면 좋다.

식사 중 메뉴와 함께 놓인 메시지 카드의 QR을 스캔하면 식재료 소개가 담긴 브런치 페이지로 연결된다.
꽤 길지만 천천히 읽다 보면 이 토란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으로 자라났는지 차분히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식경험을 통해
손님들 역시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음식을 만났을 때
“이건 어디서 왔을까?”,
“어떤 농부가 재배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식생활을 갖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뿌리채소를 오랫동안 볶는다. 곧 키마 커리로 완성 !
우보농장의 백팔미
복실복실 노루궁뎅이 버섯

곱게 다진 뿌리채소와 템페를 올리브오일에 볶는다.

약불에서 서서히 오랫동안 볶은 우엉은 고소한 향을 내고

당근은 단향이 충분히 올라온다.

108가지의 토종쌀이 블렌딩 된 우보농장의 백팔미.

밥 한 그릇에 이렇게나 다양한 토종쌀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한 경험이기에 농부의 노고와 땅의 시간에 깊이 감사할 필요가 있다.



지리산 자락 하동 조남원 농부님의 토종 다래.

토종 다래를 아세요?

열매가 달아서 달+애, 다래란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에도 등장할 만큼 흔하고 오래된 과일이다.

대부분의 토종이 그러하듯, 오랜 세월 사라졌다가 누군가의 그리움 혹은 책임감으로 복원된다.

키위와 비슷한 생김새, 앙증맞은 모습이 입에 쏙 넣어주고 싶은 모양새다.

껍질째 먹는 다래는 극강의 달콤함을 가졌다.

다래는 배송이 오면 바람이 통하게 면포를 씌워 그늘에서 맛을 들인다.

하루 이틀 두면 말랑해지는 그때 씻어서 한 알 입에 쏙 넣으면 새콤달콤 참 맛있다.


혜민농원의 홍무화과.

무화과를 반을 가르면 무화과 즙이 가득하다.

굉장히 높은 당도와 얇은 껍질로 가을 샌드위치로 제격이다.


바게트에 올리브오일 뿌려 노릇하게 굽고, 백간장 모로미로 만든 페스토, 충남 매봉농원의 토마토로 만든 소스를 바른다.

거기에 시오코지 당근절임, 루꼴라, 무화과, 노루궁둥이 버섯 구이를 올려 샌드 한다.


빵은 디토 브레드의 바게트를 선택했다.

이유는 한 가지. 재료가 좋아서다.

평소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같은 제분소의 밀가루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맛을 확신했다.

오가그레인의 맷돌제분 우리밀은 밀의 입자와 향부터 다르다.


충남 부여의 옥광밤, 프랑스 보늬밤 스프레드, 국산 보늬밤 조림으로 만든 밤 바스크 치즈 케이크가 커리플레이트의 디저트로 나갔다.


우메보시, 발효커리, 아마코우지 옥광밤 잼도 구매가 가능했다.




이번 절기에 함께한 생산지와 생산자들을 모두 다 적어내지 못했다.
언니네 텃밭의 토종콩, 누룩공방 배나무실 쌀누룩, 충남 곳곳의 농가들, 우비그릇…
수많은 시간과 손길이 모여 하나의 절기를 채워주었다.


우비그릇의 그릇을 매우 좋아함.



그 덕에 나는 접시 위에 참 많은 것을 올릴 수 있었다.
계절의 식재료, 땅이 들려주는 시간, 생산자의 진정성, 절기가 품은 에너지까지—
단순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이 가치를 어루만졌다는 사실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카페 일기와 함께한 1년의 절기 프로젝트는 이로써 한 계절을 닫습니다.
2026년에는 더 많은 이야기와 더 깊은 계절을 식탁 위에서 마주하는 경험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A good meal makes a good life.

Life is Macrobiotic.


from carol


25년 마지막 절기 식탁







손님이 남겨놓은 글을 보고

“우리는 이 맛에 장사하지!” 하고 모두 웃었다.

긴 사계절을 지나 다시 떠올려보면,
녹록지 않던 순간들을 버티게 해 준 건
단연코 이렇게 스쳐가는 순간의 행복들이었다.

팝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도,
카페 일기 사장님들을 알게 된 것도,
우연처럼 찾아온 농가의 좋은 작물도—
모두 때맞춰 내리는 계절의 비처럼
자연스럽고도 놀라운 선물이었다.

더운 여름 끝에 가을비가 스며들 듯,
기적은 여전히 조용히,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11月 9日, 빵과 커리,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