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을 배웠던 친구에게 탈색에 대해 물어봤다. 하지 말란다. 한번 더 물어봤다. 하고 싶으면 한 번쯤 해봐. 그런데 굳이 추천하고 싶진 않아. 다들 예상했겠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생에 첫 탈색은 셀프로 진행되었다. 금방 맵고 싸한 냄새가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눈이 따갑고 시큰거리고 무언가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급한 대로 선글라스를 쓰고 눈을 감고 탈색 약을 덕지덕지 발랐다. 미용자격증도 미용 경험도 없었지만 옴브레 염색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미용실에서 수십만 원짜리 투톤 그라데이션 탈색을 하려고 한다면 나의 탈색 방법을 추천해 줄 수 있다. 내 방법은 만원이면 충분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머리 색을 바꾸는 재미에 취미를 붙였던 때였다.
줘도 못 먹는 헤어 영양제에 돈을 날리며 샛노랗게 탈색이 된 머리카락에 푸른색을 입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탈색모에 염색을 하면 컬러 유지력이 그리 좋지 않다. 달마다 다채로운 컬러를 만나볼 수 있지만 원하는 색을 꾸준히 유지할 수 없다.
노란색은 시작에 불과했다. 굳건하게 건강한 모발을 내어주는 두피에게 미안할 정도로 취미생활은 한동안 이어졌다.
어느 날은 파마가 하고 싶었다. 미용실에 가서 물었다. 컬이 안 나오는 것은 둘째치고 머리카락이 녹아 부스스하게 사라질 거라 하셨다.
기르면 잘라내고 기르면 잘라내고를 반복했다. 볼륨감 없이 늘어진 생머리는 뿌리, 중간 모발층, 아래쪽 색상이 모두 달랐다. 은근히 매력 있다가도 지저분해서 넌더리가 나기도 했다.
그냥 잘라버릴까 하는 유혹이 마구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무한도전 정형돈 머리와 알까기의 최양락 머리를 한 번씩 검색했다.
어차피 잘라낼 머리카락이라면 마지막으로 한번 스타일의 변화를 주자 싶었다. 한 번도 안 해본 머리면 좋을 것 같았다. 하필 또 히피펌이 유행이었다.
머리 진행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4만원이 껑충. 수업료일까. 총 11만원에 히피펌을 하고 왔다. 전초전이었던 히피펌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또 8개월을 못 잘랐다.
다짐을 할수록 실행이 어려웠다. 예약도 필요 없고 들어가는 동시에 바로 머리를 할 수 있는 동네 작은 미용실에 갔다. (이런 미용실은 꼭 70년대 유행했을 법한 여성 이름이 적힌 ‘000 헤어’라고 적혀있다.)
망설이면 또 몇 달을, 아니 몇 년을 못 잘라내겠지 싶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저 머리 짧게 자르려구요"라고 말했다.
슥슥 하는 소리와 함께 케케묵은 탈색+염색+파마머리가 날아갔다. 선글라스 쓰고 탈색하던 시절을 지나 온갖 색으로 염색을 해보고 모든 걸 내려놓는 경지에 이르러 히피펌을 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7분 만에 끝이 났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이 별것도 아닌 것을 못해서 7년 동안 아무 짓을 했구나.
제기능을 상실한 것들을 걷어내니 훨씬 예쁘다. 얼굴은 작아 보이고 목은 길어 보인다. 얼굴형이 좀 보완되어 귀엽고 상큼한 느낌도 있다. 깔끔하고 차분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진작 자를 걸.
결심은 한번 미루면 수백 번 미루게 된다. 한 번이 쌓여 1년, 2년, 그렇게 7년이 된 것이다.
언뜻 보면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단발머리 같지만, 긴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는 작은 망설임들이 여러 번 축적되어 있었다.
그날은 단지 만기 된 적금을 찾으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만기 된 미룸을 끊어내러 간 것이었다. 큰 일을 해치우는 것처럼 마음을 먹으면 실행이 어려우니까.
언제 다시 기르나 싶어 잘라내지 못했는데. 자르고 나니 다시 그만큼 기를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현재 모습에 아쉬움도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을 경지에 이르면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지나 보다. 언젠가 줄곧 유지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다시 마주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의미도 없는 현재의 모습에 갇혀 새로운 걸 거부하고 있었나 싶어 스스로가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간 다채로웠고 즐거웠으니 됐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도 만족스러우니 됐다.
결국 해야 하는 일들은,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 제 스스로 알아서 행해지는 것 같다. 수백 번, 수천번의 결심들이 무색해질 만큼 저절로 알아서 제때를 찾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