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뜨겁게 끓인 육개장 한 그릇

by 타래

벌써 네 번째 명절이다. 두 번은 본가에서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장도 같이 봐드리고 만두도 직접 빚고, 손질하시는 것도 도왔는데, 세 번째 명절은 바로 전 날까지 일을 하느라 겨우겨우 시간 맞춰서 도착했고, 이번은 임신을 이유로 적당한 자유를 주셨다.

엄마의 차례상을 함께 하는 것과 시댁에서의 차례상은 정말 다른다. 음식 잘 하기로 유명한 전라도 할머니의 부산식 차례상차림은 올리는 음식의 가짓 수도 그렇지만 양도 참 많다. 성인 남자 팔뚝만한 생선을 여섯 일곱마리를 장만해 두었다가 찌고 식히는 일, 전 대신 하는 갖가지 튀김들, 게다가 우리집은 일단 모이면 식구가 많다. 이제 더이상 꼬맹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사촌 동생들까지 포함하면 스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명절은 늘 그랬다. 북적북적하고 약간의 훈계와 투정, 한 일은 딱히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은 잘 갔고 이른 저녁은 먹은 어른들은 간단히 차린 술상을 옆에 두고 ‘그림을 맞췄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처음 맞은 명절은 말 그대로 충격! 이었다. 무엇보다 모이는 식구가 적고 적어 시부모님 두 분과 남편과 나. 두 형제이지만 미국으로 가 있는 형을 대신하는 남편은 사실 오래 전부터 없는 딸 대신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었다고 했다. 시부모님 두 분 모두 충청도 내륙 쪽이 고향이신 탓에 상차림도 간단했다. 떡국제사에는 생선도 올라가지 않았고, 전도 다섯가지 간단하게, 산적도 상에 올리는 딱 그만큼만, 상을 물리거나 하지도 않았고, 국을 물리고 숭늉(물)을 올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시집와서 되려 일이 줄어든 나는 명절이 휴일이 되었다. 낮시간에 어머님이 준비해 두신 전 재료를 색색이 모양내 잘 부치기만 하면 전 날 준비는 끝. 그나마도 양이 적어 한 두시간 앉아 이야기 나누면서 한다. 전을 부치는 동안 어머니, 아버지는 번갈아 오셔 앉아 아들며느리 근황을 물어보신다. 궁금하셨던 것도 말씀하시고, 핸드폰 게임도 설명해달라 부탁하신다. (물론, 어머니는 여전히 일이 많다. 나물 준비도 하셔야 하고, 탕국 준비도 하신다. 며느리가 좋아한다고 불고기도 재우고, 그 와중에 (식당)장사도 하신다. 맡기면 잘 할꺼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아직은 직접 하고 싶다고 꼭 당일 새벽에 혼자 일어나 하신다.)


할머니와 엄마, 작은 엄마, 숙모에 가끔 투입되는 나와 동생까지 북적거리던 주방과는 사뭇다른 분위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복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의 명절은 피곤하다. 일주일, 삼일, 하루 전 날 필요하신 거 있으신지 따로 전화를 드리고, 가선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애매한 자세에서 일을 해야하고, 믿고 맡겨주셨지만 일일이 할때마다 체크를 받아야 하고, 이제는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까’ 하는 제기를 그때 그때 사정에 맞춰 잘 챙겨야 하는 그런 여려가지 상황과 함께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무엇보다 힘든 미션이 있다. 전을 부치고는 전을 한 두 접시 같이 먹고, 떡, 식혜, 과일에 배가 고프진 않지만 시간 맞춰 밥도 먹어야 한다. 편해도 불만이라니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그렇게 눈치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괜히 눈치보는 며느리의 명절이 지나고 나면 냉장고에 전과 떡 그리고 과일들이 가득해진다. 처음엔 전찌개도 끓이고 떡을 바싹 구워 조청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한 주가 지나면 어김없이 하는 말.


[칼칼하고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사실 이번 명절은 뱃 속에 꼬맹이가 있는 덕분에 훨씬 수월했지만, 그만큼 더 피로하고 힘들기도 했다. 게다가 남편이 거의 일주일을 쉬면서 내내 휴일모드 ON. 그렇게 휴일이 끝나고 생활로 복귀한 지 오늘이 딱 5일째 되는 날이다. 금요일. 명절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냉장고에서 묵은 것들로 끼니를 해결하다가 오늘은 반드시 ‘칼칼하게 맛있는’ 국을 끓이고, 새 밥을 짓고, 간단하게 반찬 몇 가지에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양지를 사서 육수를 낸다. 누린내 나지 않는 신선한 고기엔 파 한 대 씻어 손으로 뜯어 같이 넣어 육수를 만든다. 한 시간 정도 끓이면서 위에 뜨는 것들을 제거하면 고소하고 달큰한 육수가 만들어진다. 그 사이 파 두 세 대를 손가락 길이로 썰어 물에 씻고, 무를 썰고, 고사리, 토란대, 숙주를 준비한다. 양지를 건져 결대로 죽죽 찢어 준비했던 채소들과 같이 담고 고춧가루, 다진마늘과 함께 집간장으로 무쳐놓는다. 냄비에 참기름을 약간 두르고 잘 양념된 양지와 채소들을 넣어 볶는다. 고춧가루가 뜨거워지면서 매콤한 향이 온 집 안에 퍼진다. 육수를 붓고 끓인다. 센 불로 끓이다가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낮춘다. 그 사이 밥도 새로 짓고, 달걀도 서 너알 풀어 달걀말이를 만든다. 냉장고에 있던 콩자반을 꺼내고, 수시로 먹으려고 데쳐둔 브로콜리도 꺼내어 그릇에 소복하게 담는다. 냉동고에서 나올 날만 기다리던 뱅어포를 두 장 꺼내 살짝 구워 자른다.

그 사이 남편은 퇴근 버스에서 내려 혹시 필요한 거 없냐고 묻는 전화를 한다.


“그냥 얼른 들어와요. 육개장 끓였어요. 칼칼하게~ 뜨끈하게 밥 먹자”


거의 2주를 묵은 반찬에 바깥 밥만 먹던 착한 남편은 차려진 식탁을 보고 ‘좋아, 좋아’를 연발하고, 먹으면서도 맛있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다.



고맙긴, 이번주엔 내가 조금 게을렀잖아. 그냥 조금 실증나고 그랬나봐. 명절 후유증 같은 거지 뭐.. 그러게 나처럼 편하게 명절 지내는 사람도 잘 없을텐데, 괜히 그러지? 고마워. 맛있게 먹어줘서.


육개장_후유증.jpg 육개장에는 사실 반찬이 필요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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