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고에서 재워놓은 닭다리를 꺼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주방에서 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딱 두 가지, 깨를 톡톡하게 볶는 일과 카레가루 잘 개고 카레를 젓는 일을 시켰는데, 두 가지 모두 어린이에게 쉬운일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사방이 손톱정도 되는 사이즈로 각 맞춰 자른 당근과 감자, 양파 그리고 비슷한 사이즈로 맞춘 기름기 없는 돼지고기. 달군 냄비에 마가린을 한 숟가락 푹 떠서 넣으면 치리릭 소리를 내면서 마가린은 금방 거품이 버글버글한 액체가 된다. 그 때 미리 잘라둔 채소와 고기를 넣고 나무 주걱으로 뒤적이며 볶는다. 금방 고소한 볶은 채소향이 집에 가득해진다. 양파가 투명해질 정도로 볶아지면 물을 야채가 넘실넘실하게 붓는다.
이때다. 엄마가 어린 나를 부르는 시간. 엄마는 나를 불러 미리 잘라놓은 카레 봉지를 주면서 물에 개어보라고 한다. 우리집의 유일한 스텐인레스 그릇 윗지름 15cm에 아랫지름은 12cm정도 되는 국그릇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양푼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특유의 반짝거림은 잃었지만 세월이 묻어 질이 잘 난 스테인리스 그릇이다. 주로 가루카레를 개거나, 미숫가루를 물에 갤 때 사용하는 이 그릇에 언제나 세트인 빨간 자루 숟가락으로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가루를 갠다. 딱히 힘든 일도 아니지만, 어린 나는 최선을 다한다. 혹에라도 가루가 뭉치면 카레를 먹다가 카레가루 덩어리를 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채소가 보글보글하며 익는다. 감자와 당근을 젓가락으로 콕 찔어 폭신하게 들어가면 개던 카레를 붓는다. 이 때부터가 진짜 일이다. 잘 끓던 채소는 카레물이 들어가면서 갑자기 조용해진다. 동생과 장난이라도 칠라면 엄마가 다그친다. 빨리 저어! 들러붙는다!
동계올림픽으로 들썩거리며 늦게까지 티비를 보기도 했고 주말이라 어영부영하다 늦잠을 잤다. 하필 할 일도 많은 날 늦잠이라니, 어젯밤 야식도 하지 않아 배도 많이 고프다. 몇가지 급한 일을 하고 보니 벌써 시간이 열 두 시다. 늦어도 한 시 삼십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국이든 찌개든 끓이고 반찬 몇가지 꺼내 먹기엔 시간이 조금 부족하다. 급하게 밥을 솥에 올리고 냉장고 채소칸에서 감자 당근 양파를 꺼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두 개 남은 새송이 버섯도 꺼냈다. 후루룩 씻어 빠르게 깍둑 썰기를 한다. 두툼한 무쇠냄비에 불을 올리고 버터를 꺼내 툭 잘라 냄비에 던져 넣는다. 아직 불이 덜 올라왔는지 버터는 뱅글뱅글 도는데 녹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마음이 급해 덜 녹은 버터위에 감자 당근을 넣는다. 긴 나무 수저로 뒤적이며 썰다 만 양파를 다른 한 손으로 자른다. 양파를 넣고 조금 뒤적이니 그제야 열이 오른 무쇠냄비가 진가를 발휘하며 양파가 투명하게 익는다. 받아 놓은 정수물을 냄비에 붓자 치익- 소리를 내며 채소가 이내 물에 잠긴다. 익어라 얼른 익어라. 그 사이에 압력밥솥은 어느새 칙칙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소리나기 시작해서 3분 불 줄이고 3분 끝. 압력솥의 불을 끄고는 머리를 감으러 욕실로 갔다. 그 사이 잠시 나갔던 남편이 돌아와 남편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카레가루를 넣고 저어줘요. 불도 줄이고. 남편은 이거 물에 따로 안 개도 되냐고 묻는다. 요즘은 과립형이라 따로 물에 안 개고 넣어도 잘 풀린다고 말을 하는데 이게 남편에게까지 소리가 닿고 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감고 털고 주방을 보는데 남편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카레가 너무 뻑뻑한거 아니냐 묻는다. 물 조금만 더 넣으면 된다고 말하려다 그냥 그건 내가 해야겠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와 남편이 쥐고 있던 긴 나무수저를 넘겨 받았다. 땡큐. 남편은 자연스럽게 수저를 챙겨 식탁으로 간다. 그 사이 뜸이 다 든 밥의 뚜껑을 열고 밥을 보슬보슬하게 푼다. 후 후 불어가며 큰 김이 빠지도록 두고 카레 냄비에 물을 조금 더 붓고 줄였던 불을 다시 올린다. 버글버글버글 소리를 내면서 카레가 다시 끓는다. 떠 놓은 밥 위에 예쁘게 담는다. 밥이 절반쯤은 보이게, 당근과 감자 양파, 그리고 버섯이 골고루 보이도록 혹 밥을 먹다 카레가 모자라지 않도록 국물도 좀 자작하게 담는다.
다 됐다. 식탁으로 카레가 든 짝이 안 맞는 파스타 접시 두 개를 들고 간다. 남편은 언제나 처럼 밝은 표정으로 잘먹겠습니다. 아우 맛있겠다흐. 라고 말한다.
아. 닭다리!! 노릇하게 구워 밥 위에 하나씩 척척 올리려 해동시키던 닭다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 난 고기 안 들어간 이런 카레가 좋아요. 굳이 고기 안 넣어도 너무 맛있잖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