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단다.

엄마의 양배추 김치

by 타래

어렸을 적에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양배추 김치 냄새도 싫어."

그때까지 나는 양배추 김치를 먹어본 적은 물론이고, 본 적도 없었다.

70년대에는 여름이면 배추가 없거나, 있더라도 너무너무 비싸서 여름김치는 으레 싸고 양 많은 양배추김치 였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당연스럽게 먹을 수 밖에 없던 양배추 김치는 엄마 표현대로라면 '징그럽게 많이 해줘서 양배추 삶은 것도 싫고 냄새도 싫었던' 말 그대로 징글징글한 추억의 음식인 것이다. 70년대에는 정말 종자개량이 덜 되었거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여름엔 배추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하우스에서 하는 농사도 없었을테니까, 어쩌면 우리 외갓집이 많이 가난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난 한 달 동안은 정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가볍게 배가 유난히 아픈 장염으로 시작해서 통증은 점점 가슴쪽으로 올라오더니 먹는 것이 불편하고 매일 입던 브래지어조차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래로 위로 먹고 마신 것들을 확인하는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부터 복통과 흉통, 더불어 편두통까지 온 몸에서 이제 그만 병원으로 달려가라는 신호를 보내어 가까운 내과로 갔다. 가뜩이나 쉬지 않고 마시는 술 덕분에 튀어나와있는 배가 요즘들어 더 나오는 것 같다 생각했던 배는 말그대로 염증덩어리가 되어 부어있던 것이고, 참을 인을 백 번 정도 새겨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흉통은 과다한 위산분비로 인한 위염_어쩌면 위궤양_이고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심한 편두통은 온 몸에 있는 염증들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던 것이다.결국 어찌어찌 위경련이라는 것까지 만나고 집근처 Y대학병원 응급실까지 다녀오고는 정신차리고 약도 잘 챙겨먹고 식이조절도 하고 있는 중이다.


"일단 자극적인 음식은 다 안 드시는 것이 좋구요. 카페인 안되구요. 밀가루 안되요. 탄산음료도 안되구요. 왠만하면 죽을 드시는 것이 좋겠네요. 많이 불편하시면 또 바로 '응급실'이라도 오시구요. 참! 술이랑 담배는 절대 안됩니다. 뭐 하긴 젊은 여자분이시니까 그 정도는 따로 주의드리지 않아도 되죠?"


맵고 짠 음식, 밀가루, 카페인,술, 탄산음료. 안돼. 안돼. 안돼. 안돼.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냐? 습관처럼하는 다이어트보다 더 지독한 식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단은 흰 죽, 채소죽, 채소새우죽, 호박죽으로 속을 몇 일 달랜 다음 맵고 짠 음식, 밀가루를 제외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에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어 먹었다가 영영 세상을 하직하는게 아닌가 싶은 고통도 느꼈고, 커피와 술은 옆에서 마시는 사람보면 자연스럽게 코를 벌릉거리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물론 매주 만나던 친구들도 못 만나고, 퇴근 후와 주말엔 거의 집에만 있는 생활이지만 그 생활도 썩 괜찮아져서 덕분에 이제는 집안 정리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는다. 몸이 불편하고 제일 좋은 것은 직업이 곧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집에서 만들어 먹지 않던 음식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재료 선택하기, 정성으로 다듬기, 양념하기, 조리하기, 잘 차려서 먹기. 참 쉬운 말인데 제일 지키기 힘든 일들.


여튼 그러한 이유로 나는 여전히 음식을 가려서 먹고 조심스럽게 먹는 중이다. 심지어 장이나 위에 좋다고 하면 챙겨먹기까지 하고 있다. 여러가지 식재료 중에 단연 위에 좋은 것, 하면 양배추인데 양배추는 다른 식재료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고 계절에 따라 크게 가격차가 있지 않아 심심찮게 식탁에 올릴 수 있다. 게다가 생으로 곱게 채를 썰어 드레싱을 뿌려먹는 방법도, 적당한 한 입 사이즈로 썰어 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좋고, 무엇보다 삶거나 쪄서 쌈을 싸먹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참고로, 양배추쌈을 먹는 방법으로 10년 전에 깜짝 놀란 일이 있다. 18년 동안_물론 간난쟁이였을 때에는 먹었을 리 만무하지만_양배추 쌈에는 당연히 부드럽게 갈라지는 멸치젓갈이나 간장과 고춧가루 그리고 땡초를 쫑쫑 썰은 양념장을 넣어 싸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학생식당에서 나온 양배추 쌈 옆에는 쌈장이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양배추와 함께 나온 다시마 쌈. 다시마 쌈은 당연히 멸치젓갈 아니야? 멸치젓갈을 달란 말이다!! 이 서울 깍쟁이들아!!


최근들어 양배추값이 배추값이랑 같이 치솟고 있다. 경제까진 해박하지 못해서 정확한 사실은 모르겠지만, 동네 채소가게 아주머니도 농협 하나로 마트의 아주머니도 양배추를 들고 만지작 만지작 하는 나를 보고는


"양배추값이 내려올 생각을 안하네. 그래도 맛은 있으니까 가져가요. 아가씨"


라고 말씀하신다. 한 통에 6000원까지 보았다. 들어보면 속이 꽉 찬 듯 묵직하지만, 양배추 한 덩이_이것도 포기라고 하는 것이 맞는건가?_를 내 마음 속 정해 둔 양배추 값의 두 배정도되는 것을 선뜻 카트에 담지는 못하겠다.


오늘 저녁에 들른 마트에서는 양배추를 세일하여 판매하였다. 사실 어제 낮 마트에 갔을 때 전단지를 보았더랬다. 양배추 할인. 오늘은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마트에 들러 양배추를 사서 집에 가지고 와야겠다 싶었다.퇴근 후 들른 마트에는 아직 양배추가 몇 통 남아있었고 가격은 330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얼른 두 통을 들고 카트에 넣으면서 나는 반통은 쪄먹고 나머지는 채썰어서 오랜만에 사우어크라우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식 김치. 수제 소세지와 먹으면 환상의 궁합이다. 먹다 질리면 소세지를 썰고, 사우어크라프트에 얇게 사과를 썰어 살짝 볶아 먹어도 맥주안주로는 그만이다. 그러다 문득, 이왕이면 독일식 김치가 아니라 우리식 김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예전 엄마가 징그럽게 먹었다던 그 양배추 김치. 김치만들기엔 아직 영 자신이 없지만, 최근 몇 번 어깨넘어로 김치 만드는 것도 보았겠다 뭐 실패하면 아삭한 그 맛으로라도 먹고 안되면 물넣고 대충 끓여 고기 슴벙슴벙 썰어넣고 그 맛으로라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생강과 마늘, 새우젓을 조금 샀다. 워낙에 젓갈냄새가 나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여름에 시원한 맛으로 먹을 김치는 새우젓이 좋다고 엄마가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 같다.


자신.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배추김치를 실패했다. 못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맛도 역시 아닌 김치들. 그냥 냉동고에 있는 엄마표 양념을 넣어 버무릴까 싶었다가 그냥 찹쌀로 풀을 쑨다. 양배추는 한 입 크기로 썰어 한 장 한 장 서로 떨어뜨리고 집에 있는 간수한 천일염을 뿌려 절여둔다. 한 웅큼, 두 웅큼. 모자란가? 세 웅큼. 물을 반 쯤 붓고 한 번 뒤적인다. 의심스러워 손가락으로 물까지 푹 쑤셔 간을 본다. 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실패 후에 늘 성공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경험으로 조금 덜 실패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지난 실패를 미루어보아 간이 세지 않을까하며 김칫거리를 덜 절이면 나중에 꼭 사단이 난다. 물이 질척하게 나오거나 보글보글 개어 오르거나. 일단 절이는 간은 적당한 듯하다.


찹쌀풀에 고춧가루를 넣고 색을 맞춘다. 생강과 마늘을 액젓을 조금 넣고 블렌더에 간다. 전부 섞어 양념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뻘건 김치 양념. 또 간을 본다. 모르겠다. 싱거운 것 같기도하고, 아차차! 새우젓을 넣지 않았다. 다져둔 새우젓을 넣는다. 간을 본다. 아직 밍숭맹숭하다. 소금을 조금 더 넣고 나니 간이 맞는 것 같다. 김치간은 익기 전에는 조금 세다 싶은게 좋다. 채소에서 물도 나오고 삭으면서 간이 맞아들어간다고.


모름지기 김치라면 무채정도는 들어가주어야 김치친구들 사이에 명함을 내밀수 있는 것 같지만, 오늘 양배추김치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하얀 양배추. 빨간 양념. 그리고... 초록색 부추. 깨끗하게 다듬어 씻은 부추 한 단을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자른다. 왠지 좀 양이 많은 것 같다. 이러다 양배추김치에 부추가 출연하는게 아니라 부추김치에 양배추가 까메오가 될 것 같다. 뭐 어때? 김치로 맛있으면 되지.

양배추에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버무린 김치에 부추를 한 주먹 넣어 살짝 뒤집어 준 다음 김치통에 담는다. 부추가 좀 많다 싶을정도로 섞어 다 담았는데도 부추가 좀 남았다. 양념을 부추로 쓸어내려 손으로 살살 비벼 버무린다. 양배추 김치 위에 덮어 손으로 살짝 눌러준다.

양배추와 한 판 씨름을 하고 나니 시계는 벌써 밤 10시. 왠지 뿌듯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손에 묻어있던 양념이 아이폰 화면으로 옮겨간다. 찍자마자 엄마에게 사진을 보냈다.


[괜찮네. 그거 생으로 그냥 장아찌처럼해도 맛있을 껄. 난 양배추김치는 별로]


엄마는 할 말만 하고, 하고싶은 말은 하는 시크한 경상도 아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