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자연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유럽연수의 첫 방문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방문지는 30년의 역사를 가진 북 프리슬란트 자연경관보존협회다. 북 프리슬란트는 네덜란드 전역에 존재하는 40여개의 농민중심 자연경관보존협회 중 하나이다.
낙농업이 주를 이루는 이 지역에서, 농부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조직이다.
협회장은 우리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농부는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라, 자연을 함께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태 다양성이 높은 경관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는 작지만 동물이 가득한 농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소, 양, 닭, 토끼, 개. 하지만 협회 일이 바빠서 농장은 거의 아내가 돌본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땅의 의미와 농업의 방향에 관한 철학이었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매우 집약적입니다.
우리는 수출을 위해 생산량을 극대화해 왔고, 그 결과 토양과 생태계가 무너졌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고,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협의체를 꾸렸다고 말했다.
위트레흐트(Utrecht)에 본부를 두고, 전국 40여 개 지역 협회가 연대한다.
놀라운 건 이 구조가 강제나 지시가 아니라 자발성과 신뢰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협회에 소속된 600개 농장, 800명의 농장주, 200여 명의 일반 시민이 총회를 구성하고, 이사회를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일반 시민은 정식 농장은 아니지만 각자 작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토지주)
이사회에는 관리국이 있고, 경관 관리국은 토목 공사나 인프라 작업 등 현장의 실무를 담당한다.
또 활동단이라는 조직이 조류 관찰, 보호, 토질 향상 등 주제별로 구성되어 실제적인 환경 관리 활동을 수행한다.
연구 부서인 필드랩은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토양과 수질 연구를 진행하며, 그 결과에 따라 농법과 경관 관리 방식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
12개 도의 각 협회에서 이사회 대표들이 모여 사무국장을 선출하고, 사무국은 전국 단위의 운영과 주요 의사결정을 맡는다.
이 사무국에서 내려진 결정을 실제로 실행하는 주체는 각 지역 관리국이다.
이렇게 전국 단위의 대표 조직을 갖추는 이유는 명확하다.
지역 협회 단위로는 정부, 특히 농림부와 직접 협상이 어렵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선 전국 조직이 필요하다.
이 전국 단위 조직의 이름은 ‘자연을 위한 농부들(Nature Farmers)’이다.
정부가 환경 혹은 농업 관련 규제를 개정하고자 할 때, 이 조직을 통해 협의가 이뤄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국 조직 구조는 지역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영된다.
프리슬란트에는 총 7개의 자연경관보존협회가 있고, 6주에 한 번씩 전체 회의를 연다. 프리슬란트 협회의 사무국은 직원 3명과 비서 1명, 그리고 연구를 담당하는 전담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중 가장 기초 단위의 협회를 방문한 것이다.
작은 토지 소유자까지 포함된 이 공동체는, 그야말로 땅을 일구는 이들이 스스로 거버넌스를 만들어내는 현장이었다.
자연경관 관리의 중심은 ‘토양’이었다.
“생태 다양성은 곧 토양의 질입니다. 토양이 유기적으로 건강하면, 곤충과 다양한 유기물들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 다양성을 높이는 노력은 토양의 질을 바꾸는것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붉은꼬리딱새(redstart) 라는 프리슬란트의 특별한 철새는, 3월에 프리슬란트에 와서 6월에 아프리카 남단으로 떠난다. 새가 둥지를 트는 시기엔 풀을 베지 않으며, 비가 고인 늪에는 물을 더 채워 늪이 마르지 않도록 물길을 유지한다. 6년마다 가지를 자르고, 25년 주기로 숲을 정리하며, 자원의 순환이 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실험하고 개선한다.
이 단순한 순환의 논리를, 그들은 정책으로, 협약으로, 제도로 묶어 실현하고 있었다.
협약은 6년 주기로 갱신되며, 동의한 농민은 일정한 보조금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돈으로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이 협회에서 말하는 ’보조금‘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였다.
자연을 돌본 농민에게 사회가 지불하는 <정당한 보상>이다.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경관과 생태계를 함께 ‘관리’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어기면 보조금을 반납해야 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보다 신뢰와 책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말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그곳의 농민은, 정부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환경을 함께 관리하는 능동적 주체였다.
“자연은 공공재이며, 지역 고정재다. 사고팔 수 없고, 수출입도 불가능하며,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와 관계 맺는다.“
말뿐이 아니었다. 스스로 회의에 나가고, 정책을 검토하고, 보조금의 기준과 방식까지 논의하는 모습. 그들은 농사만 짓는 이들이 아니었다.
지역의 미래를 결정짓는 한 명의 시민이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질문 시간이 끝난 후 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농민들은 사실 회의 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에 땅을 보고 싶어 하죠. 그러니 저희가 대신 나가는 겁니다. 농민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요.”
그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누군가 대신 회의에 나간다는 건, 단지 대리 출석이 아니라, 농민의 삶과 땅의 목소리를 누군가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또, 이들은 회의전에 다함께 노래로 시작한다고 한다. 협회장은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민요 같은, 잔잔하고 반복적인 선율이었다. 이곳에선 회의가 말로만 시작되지 않는다. 노래로 먼저, 마음을 모은다.
“이건 전통이라기보단, 마음을 가다듬는 예의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농민 대부분은 아침부터 이미 소젖을 짜고, 밭을 정리하고, 정신없이 달려와요. 그래서 회의 전에 잠깐 숨을 고르는 거죠. 말보다 먼저 마음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노래는 잠깐이었지만, 나에겐 길게 남았다.
행정이 아니라 공동체,
절차가 아니라 연결.
이 협회의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말하라면, 아마 '노래로 시작하는 회의'라고 해야 할 것같다.
이들은 자신을 농민이라 하지 않고, ‘청지기’라 부른다.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잠시 돌보는 자로서의 태도.
그것이 이 협회를, 이 공동체를, 이 토양을 버티게 하는 철학이었다.
자연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관계다.
그리고 농업은, 자연과 맺는 삶의 방식이다.
자연은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자산이나 자원으로만 다루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협회에서 만난 20대의 농장 후계농의 낙농장으로 이동했다. 농장주는 힐리어 아스트리나.
이 곳은 유기농 인증을 받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농장 또한 ‘건강한 생산과 자연경관’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젖소마다 발찌가 채워져 있어 개별 움직임과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상태에 따라 우유를 짜는 작업을 조율한다.
병든 소나 충분하지 않은 상태의 젖소는 자동으로 기계에서 제외된다. 데이터는 소의 이동부터 우유량까지 기록하고, 건강 관리 소프트웨어를 통해 분석된다. 농업의 디지털 전환이 이곳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녀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농장을 공동 경영하고 있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아직 지분을 갖고 있지 않지만 나중에 경영에 참여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의 농장에는 300마리의 젖소가 있으며 매일 2000ml 의 우유를 생산하고, 하루 3번(새벽 4시, 정오 12시 30분, 저녁 8시)우유를 짜서 요거트, 버터, 우유 등 다양한 유제품을 생산한다.
생산된 유제품은 전량 지역 주민과의 직거래를 통해 판매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농장을 직접 찾아와 젖소를 보고, 우유를 사 간다. 힐리어는 이 유통 구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순한 생산이나 판매가 아닌 ‘지역과의 연결’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우리는 그냥 우유를 파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돌보는 땅과 동물, 그리고 우리 삶을 같이 나누는 거예요.”
150헥타르의 땅 중 40헥타르는 옥수수밭으로 활용되며,
나머지는 풀을 키우고 젖소들이 뛰노는 초지다.
농장 규모나 방식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 농장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게 넘기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이 땅이 저희 가족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지역 전체의 경관이고, 우리의 정체성이니까요.”
Q. 한국에서는 현장 농민의 목소리가 정부에 잘 닿지 않는데, 네덜란드는 어떻게 농민의 의견을 정부까지 연결하나요?
A. 네덜란드는 4년마다 의회 선거로 내각이 교체되는 내각제 국가입니다. 정책의 연속성이 흔들릴 수도 있지만, 농민들의 대표 조직인 전국 단위 협의체가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상하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즉, 개별 농민이 정부를 설득하지 않고, 조직이 목소리를 모아 전달합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직접 회의에 나가기보다, 협회가 대변 역할을 수행합니다.
Q. 자발적 참여라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농민이 참여하고 있나요?
A. 이 협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지역 농민의 80%가 참여했습니다.
지금도 프리슬란트 도 전체의 농지 중 약 10%, 이 협회가 있는 북부 프리슬란트 지역에서는 약 30%의 면적이 경관보호 협약을 통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Q. 보조금 제도는 어떻게 운영되며, 위반 시 어떤 일이 발생하나요?
A. 보조금은 6년 주기의 협약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농민에게 지급됩니다.
그러나 협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받은 보조금을 반환해야 합니다. 정부는 모든 농민에게 직접 정책을 시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협회를 통해 보조금을 집행하고, 협회가 내부적으로 관리와 감독을 합니다.
Q. 일반 농민들과 친환경 농민들 사이의 갈등은 없나요?
A. 물론 다양한 농민 단체가 존재하며, 환경운동을 강조하는 급진적 단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협회는 친환경 여부에 관계없이 '자연 경관을 책임지는 농업'에 초점을 둡니다. 자연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농민이 공감하기 때문에, 이념적 갈등보다는 실천 방식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Q.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직이 방향을 유지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조금 때문인가요?
A. 보조금도 중요한 요소지만, 핵심은 '사람'입니다. 처음 조직을 시작했던 농민들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고, 그들이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 관계, 땅을 돌보는 태도의 일관성이 조직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뭘 바꾸자는 게 아니에요. 좋은 걸 지키자는 거죠.”라는 말이 그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이 경관 덕분에 초등학교나 시민 교육이 활발해지고 있고 우리가 해 줄 이야기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우리의 이런 활동에 대해서 도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는거죠.
보조금에 맞춰서 조직을 운영해온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오는 것들, 그 가치들을 계속 어필하고 그 활동에 대해 지원을 받고 있는것이다.
프리슬란트 자연경관보존협회(Vereniging Noardlike Fryske Wâlden; NFW)
- 주소 : Kuipersweg 5, 9285 SN Buitenpost
- 홈페이지 : www.noardlikefryskewalden.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