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농업연수 #6] 바덴농민협회

누군가의 땀, 싸움, 글쓰기, 연대의 결과

by 진정은

2025년 4월 3일(목) / 독일 / 바덴농민협회(BLHV, Badische Landwirtschaftliche Hauptverband)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반짝이는 볕이 유리 외벽에 반사되는 건물 앞에 우리의 버스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곳이 농민신문사라고요?"
곳곳에서 부러움과 감탄이 흘러나왔고, 바덴 농업신문의 편집장님과 함께, 긴 이야기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 협회 본부는 2014년에 새로 지어진 패시브하우스형 친환경 건물이었다.
반경 60km 이내에서 채취한 지역 나무로 지어졌으며, 건물 외벽은 투명한 유리로 감싸져 있었다.


우리가 왜 유리로 감쌌냐고 묻자, 편집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유리로 감싼 이유요?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잘 보이라는 뜻이에요. 투명성.”


그 한마디는 단지 건축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이 협회 전체의 운영 원칙,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민주주의의 태도 같은 것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었다.

DSC03791.JPG


협회 건물 내부에는 에어컨 대신 지하수를 이용한 바닥 순환 냉난방 시스템이 있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바람이 건물 전체를 순환했다. 단점도 있었다. 공기가 너무 건조해 직원들이 눈이 마르고 피부가 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습기를 설치했다고 했다.

DSC03792.JPG


사람 중심의 실용적 판단. 기술보다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라는 그들의 철학이 엿보였다.

층마다 철제 방화구조가 설치되어 있었고, 중앙 복도는 긴 유리창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DSC03806.JPG
DSC03839.JPG


그 투명함과 개방감은 곧 협회의 운영 원칙을 대변하고 있었다. 잘 설계된 공간이란 단지 멋진 건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아마도, 나는 그날 이후로 처음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농촌의 목소리를 담는 브랜드로 성장해야겠다’고,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말들과 풍경들이, 제주로 돌아와 다시 천천히 떠오르고 되새겨졌다.

대산 농업연수의 어느 한 곳도 내게 인상을 남기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바덴은 분명 무언가를 더 깊이 남기고 있었다.

DSC03831 (1).JPG



바덴농민협회는 농민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세운 구조, 정치와 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집단의 본부, 그리고 사회와 연결된 하나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그 건물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농민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협회 건물은 그렇게 묻고, 동시에 답하고 있었다.

DSC03814.JPG


이 조합의 역사는 전쟁 이후의 재건기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농업신문이었다. 흩어져 있던 농민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문제로 기록하고, 지역의 변화와 정책의 흐름을 공유하는 작은 출판의 시도, 그것이 곧 조합으로 확장되었다.

DSC03824.JPG


소리를 모으는 일이 조직을 만들고, 조직은 목소리를 더 멀리, 몸집을 키워 내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농민들은 하나의 힘이 되었다.


바덴농민협회는 건물의 아우라에서부터, 강의실, 편집국, 상담실, 연대 조직을 위한 회의 공간까지, 건물 자체가 농민을 위한 기능으로 촘촘히 채워져있었다.


<바덴 농민협회 구조>

* 회원 수 : 약 15,000명 (비의무 가입, 자발적 참여)

* 핵심 기능 : 법률·정책 대응 지원, 농업 교육 및 청년·여성 농민 연대, 언론 활동 (주간 농업신문 발행), 여행·광고·보험 등 실생활 서비스

* 운영 인원 : 총 170명, 중앙 본부 100명, 지역 사무소 70명 (7개 분포)

* 공간 구성 : 교육 세미나실, 편집국 및 인쇄 준비실, 상담실 및 법률지원 공간, 정책 및 시위 조직을 위한 회의실

* 정치적 역할 : 농민 시위 조직, 시민 캠페인 기획, 행정 대응 실무 지원, 정부·EU 대상 정책 제안


정치적 요구를 문서로 만들고, 법을 검토하며, 시위를 조직하고, 시민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실무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전문가 집단.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정부의 예산이 아닌, 회원들의 회비와 조합이 직접 운영하는 수익사업을 통해 자립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게 했다.


협회의 활동 중 가장 궁금했던것 중 하나는 매주 발행되는 주간 농업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매주 14,000부 이상 인쇄되어 조합원과 구독자에게 발송된다. 그 안에는 정치 소식, 병해충 정보, 시장 동향, 여성 농민 인터뷰, 아이들을 위한 코너, 그리고 지역 작가들의 농업 소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DSC03810.JPG


한 장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각 부서가 회의를 통해 주제를 정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직원이 함께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보는 단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만들어내는 도구였다. 이들은 그 도구를 스스로 만들고, 다듬고, 나누고 있었다.

DSC03833.JPG



이 협회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2024년 트랙터 시위였다.

정부의 과도한 행정 요구와 지원금 서류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의 농민들이 베를린까지 트랙터를 타고 이동해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 협회의 치밀함이었다. 단 3일만에, 참가 농민을 모집하고, 교통수단을 확보하고, 시민 대상 캠페인 문구를 제작하고, 법적 신고를 준비하고, 언론 대응과 현장 유지를 위한 수많은 손과 머리가 움직였다.

그리고 시민들조차도 “공기가 나빠져도 계속해라”라고 응원했다.

‘소는 시멘트를 먹지 않는다’, '초록은 남아있어야 한다' 는 메시지 현수막을 제작해 협회 마당에 걸고, 이 시위는 단지 항의가 아니라 농업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사회적 선언임을 알렸다.

DSC03793.JPG


바덴농민협회는 단지 ‘농업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농업을 매개로 공동체를 설계하고, 정치에 관여하며, 미래를 위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는 조직이었다. 한국에서 농업은 종종 ‘보조가 필요한 산업’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바덴에서는 농업이 정치의 주체였고, 시민 사회의 매개자였으며, 정보의 발신자였고, 공간과 기술을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였다.


가장 의미 있었던 대화 중 하나는 협회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농민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업을 공부했고,
조합법과 정책, 제도, 지역 농민의 삶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우리는 법이 없어도 제안할 수 있어요. 권력이 없어도 들리게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의견을 모으는 데 시간이 필요하죠.”


DSC03860.JPG


그는 최저임금 문제와 EU 농약 규제, 수입농산물 경쟁, 행정 부담 등을 예로 들었다. 가축 사육 환경 규제에 맞추기 위해 농민이 액비 사용량까지 매일 기록해야 하는 현실, 환경은 보호되지만 농민은 소진된다.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좋은 성적표를 받았지만, 그 대가를 농민이 치르고 있습니다.”


농업은 고립된 산업이 아니다. 농업은 관계이고, 제도이고,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농민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제도를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기술이 아니라 조직화된 공동체에서 나온다.






현장 Q&A



Q. 협회장(조합장)은 농민이 아닌데, 협회장 자격이 있나요?

협회장은 농업 전공자이며 농업 관련 업무 전문입니다. 정관에 따라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협회장 자격이 가능합니다. 특히 이 협회는 농업뿐만 아니라 금융·판매 등 다영역 통합 조직이기 때문에 다양한 전문성이 요구됩니다.


Q. BLHV(농민협회)와 BWGV(협동조합연합)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BLHV : 바덴농민협회.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책 제안, 교육, 언론 등을 수행하는 농민 중심 조직

- BWGV : 바덴뷔르템베르크 협동조합연합. 농민뿐만 아니라 금융, 판매, 에너지 등 전체 협동조합을 포괄하는 조직

→ 역할은 다르지만 협력 관계에 있으며, 연대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 농민의 의견은 어떻게 정책에 반영되나요?

농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지역 단위에서 수렴 → 협회에서 정리 → 정치권에 제안한다.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제안 방식으로 정치적 반영을 유도합니다.


Q. 농민들이 현재 가장 어려움을 겪는 행정 절차는?

바로, 환경규제에 따른 지나치게 세밀한 서류작업입니다.

(예: 액비(퇴비) 살포량까지 수기로 기록해야 하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협회는 이를 줄이기 위한 제도 개선을 정부에 요청 중입니다.


Q. 농업 최저임금(15유로 인상)에 대한 현장의 입장은?

현장에선 인건비 부담이 커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유럽에서 온 계절노동자들이 12유로에 만족하는 상황에서 15유로 도입은 농장의 생산원가를 급등시키고 있구요. 협회는 “계절노동자에게는 예외를 두자”고 법적 유예 조항을 제안 중입니다.


Q. 독일 농업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가요?

EU의 환경규제 강화(살충제 50% 감축 등)로 인해 자유무역 체계에서 역차별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 독일 농민은 규제를 철저히 지키지만, 터키·폴란드 등 타국 농산물은 저렴하고 비규제 제품으로 경쟁력이 있거든요. 협회는 정부와 EU에 현실적인 대응을 요구 중입니다..





바덴농민협회(Badische Landwirtschaftliche Hauptverband)

- 주소 : Merzhauser Straße 111, 79100 Freiburg

- 홈페이지 : www.blhv.de



작가의 이전글[대산농업연수 #5] 카를스루에 클라인가르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