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나무가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섬으로 내려간 그가 처음 레몬 묘목을 심겠다고 했을 때는 그냥 그런 농담쯤으로 여겼다. 이제 땅이 있으니 이것저것 키워보겠다는 말 정도로 들었다. 레몬은 온화한 기후가 일 년 내 지속돼야 자라는 품종 아니었나, 계절의 부침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자랄 수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막 농부가 된 그가 레몬 나무를 심겠다고 했을 때는 못 미더운 마음이 반이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노랗고 끝이 뾰족하고 둥근 레몬이 매달린 나무를 그려봤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 레몬 나무 꽃 소식을 들었다.
레몬 나무의 어린잎은 처음에는 붉은색을 띠다가 초록으로 변한다. 초록 잎의 겨드랑이 사이에 하나 씩 혹은 여러 개 무리 지어 빨간 꽃봉오리가 맺히는데, 꽃망울이 터지면 하얗고 붉은, 달콤한 향의 꽃이 일 년 내내 핀다.
백과사전에서 찾아 읽은 레몬 나무는 그랬다. 동백나무처럼 단단한 초록 잎과 산수유만큼 붉은 꽃망울일까 상상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그렸던 것과는 달리 어린 농부가 ‘꽃이 왔다!’며 찍은 사진 속 레몬 나무는 여리고 가는 자줏빛 새순과 함께 비슷한 빛깔의 팥알만 한 꽃망울을 품고 있었다. 이파리를 접으면 꺾이는 소리도 없이 접힐 것 같은, 농부의 농부 인생만큼이나 어린 레몬 나무. 어린 나무는 땅에 심은 지 3년 정도 지나서 결실기를 맞이하고 5년쯤 지나면 시장에 내놓을 만한 크기의 열매를 맺는다. 이제 막 꽃이 온 레몬 나무는 적어도 두 번의 봄을 더 보내야 그럴듯한 레몬을 내놓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지금 보다 단단한 잎사귀와 굵은 가지, 노란 레몬을 떠올렸다.
2년 전 겨울에 농부는 조용히 말했다. ‘레몬 묘목을 심을 거예요.’
꽃이 피기 전까지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손에 잡히는 결실과 상관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고요히 그러나 부단히 움직이는 것들. 묵묵한 것들, 추위 속에 꽁꽁 숨어 어떤 일도 벌이지 못할 것만 같은, 그렇게 겨울 속에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그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역동, 회오리와 몸짓을. 땅에 내린 뿌리로 힘껏 양분을 끌어올려 뻗은 가지와 돋아난 잎사귀로 보내고, 봄이 오면 새순과 더불어 꽃망울을 틔우고, 비와 바람과 눈을 맞으며 이 땅의 계절을 온몸으로 껴안은 레몬 나무처럼.
뒤늦게 알아봤다. 묘목을 심을 거란 말속에 피어있던 꽃과 꽃 속에 열린 레몬 열매와 겨울 속에 있는 봄을 몰라봤다.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도, 미리 그려보지 않아도 단단한 잎사귀와 굵은 가지, 노란 레몬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어린 나무가 묵묵히 견디는 겨울 속에, 어린 나무의 꿈속에, 농부의 말속에, 못 미더워했던 내 머릿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