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이야기

by 산책

컵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 컵만 따로 놓아둔 찬장의 문을 열고 오늘의 컵을 고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다. 우유를 마실 것인지, 차를 마실 것인지, 원두커피를 내려 마실 것인지 우유 거품을 만들어 라테를 마실 것인지 등등. 눈을 떠 찬장 앞에 서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타고 내려 가 '딩동' 울리는 컵이 오늘의 컵이 된다. 그리고 선택된 컵에 아침 음료를 따른다. 묵직한 컵을 들고 한 모금 또 한 모금. 각성의 시간이다.

'컵'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러 번 생각해 봤다. 인터넷 서점 광고 메일에서 사은품으로 '컵'이 뜨는 달이면 그간 차곡차곡 채워둔 장바구니를 망설임 없이 과감히 비우는 이유에 대해서, 전용 맥주잔을 주는 맥주 판촉 행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그리고 역시나 카트에 담긴 6개들이 혹은 4개들이 맥주와 맥주잔),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잔을 발견했을 때 살며시 잔을 들어 바닥의 상표를 확인하고 오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컵에는 공간과 시간, 기억과 기분이 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숟가락이나 접시, 밥그릇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컵에서 그것들을 발견했다. 공간과 시간, 기억과 기분을 모두 한 데 모아 놓은 것.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컵과 그 안에 담긴 음료까지가 그렇다.

겨울 아침, 손잡이까지 뜨거워지는 노란 법랑 컵에 커피를 따르다 문득 동해의 바닷가 캠핑장에 앉아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후드 점퍼의 소매를 끌어내려 컵의 손잡이를 감싸 줬던 어느 밤, 하늘로 날아 올라가던 풍등의 무리, 소나무 숲 사이로 지나가는 밤 기차의 흔들림과 무당벌레의 등 같았던, 빨갛게 타들어가던 모기약의 꼬리. 아득하게 하늘로 흘러들어갈 것 같았던 그 여름밤. 그때는 정말 뜨거웠던 손잡이가 지금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계절에, 나는 그 여름밤을 떠올린다. 다리 밑으로 몰려드는 모기를 잡아가며 내려오는 눈꺼풀을 한 번 길게 감았다가 뜨면서 드문드문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밤.

도넛 가게 로고가 옆면에 박힌 흰색 머그컵에는 어느 한 시절이 뭉텅 그려 들어가 있다. 바빴으나 외로웠고 두렵지 않았지만 막막했던 때가.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때, 친구가 있었으나 모든 걸 털어놓지 못했던 때, 그래도 나아질 거란,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할 거라 믿었던 때,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몰랐던 때가. 그때 학교 앞 도넛 가게에서 받았던 컵은 버리지 못하고 찬장 안 깊숙이 넣어뒀다. 버린다고 사라지지 않을 시절처럼 그렇게.

오늘의 컵은 빨간 바탕에 눈송이가 그려진 컵이었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싶은 게 가장 컸다. 컵 한 가득 커피를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이 컵에는 어떤 시간과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 이 계절이 지나 다른 계절에 다시 컵을 꺼내봐야겠다. (어쩌면 마감에 촉박한 쫄깃한 마음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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