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스커트, 굽이 높고 앞이 뾰족한 구두, 붉게 칠한 입술. 백화점의 여성복 매장에서 일하던 사촌 언니가 결혼을 했다. 내가 열일곱 살 때였다. 언니는 나보다 딱 열두 살 많았다. 언니가 데려온, 앞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자는 충무로의 어느 인쇄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언니는 결혼 소식과 동시에 백화점을 그만뒀고,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집에 있었다. 결혼을 하겠다고 우리에게 남자를 인사시켰지만 예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때 언니는 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겨울이 한참일 무렵,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촌 언니는 큰 외삼촌의 딸이었다. 외숙모를 본 적은 없다. 외숙모는 가끔, 이모와 엄마의 대화 속에 등장해 존재를 가늠할 뿐이었다. 언니도 언니의 엄마를 만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가 아주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그다음엔 작은 외삼촌네에서 지냈다고 했다. 작은 외숙모와 사는 게 끔찍해 하루빨리 그 집을 나오고 싶어 했던 언니는 취업이 가능한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 이후 잠깐은 이모랑 살았고 또 잠시 우리 집 근처에 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언니는 콩나물 잡채를 만들고, 한나절 돼지뼈의 핏물을 빼 감자탕도 끓일 줄 아는, 사내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다. 그때쯤 자주 언니 집에 놀러 갔다. 나를 '이모'라고 부르는 조카아이들이 예뻤고 시장을 돌며 삼천 원짜리 반 바지를 고르는 언니가 언니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의 언니는 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이기도 했지만, 젓가락처럼 가느다랗고 뾰족해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의 언니는 숟가락처럼 둥글어졌다. 언니가 가족을 이루고 가족의 일원으로 사는 동안은 그랬다.
둥근 언니의 삶이 깨진 건 큰 조카가 여덟 살 되던 해였다. 바람을 피운 배우자, 그런 아들을 이해해 달라는 시부모, 가족이라 믿은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몇 년쯤 지났을 때 언니가 내림굿을 받겠다고 했다. 그래야 살 것 같다며, 그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한 달 내내 하혈을 하고 있다고, 옆 집 무당이 신내림을 받으라고 했다고, 결국 돈이 필요한 얘기였다. 엄마는 아버지 몰래 돈을 마련 해 언니에게 전해줬다. 차라리 병원을 데리고 가지, 없는 살림에 무당 말 믿고 돈을 준다고 툴툴 거리자 엄마는 '너희 이모도 어쩌면 살 수 있었을지 몰라.' 했다.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박수무당이었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서 외할머니의 자식들이 그렇게 쉽게, 아깝게, 젊은 나이에 사라져 버린 거라고. 엄마는 '그게 너희가 될 수도 있는 건데, 어쩌니 그럼.'했다.
내내 밖으로만 돌았던 언니의 아버지는 객사했고, 유년기의 언니를 거둔 작은 외삼촌 역시 어린 자식들을 두고 병사했다. 언니와 가장 친밀했고, 엄마의 혈육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작은 이모는 그들보다 십 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가족이 되고 싶었는데 가족이 될 수 없었다. 언니가 낳은 자식을 제외한 유일한 혈육, 나의 엄마, 언니의 고모는 어쩔 수 없단 말로 언니의 내림굿을 지켜봤다. 언니는 알 수 없는 신의 자식, 세상의 저편 누군가의 자식이 됐다고 했다. 내 몫이었을 수 있는 것을 대신 받았단 생각이 맴돌았다. 엄마의 냉정함을 대할 때마다, 철없음, 천박함, 우울함을 마주할 때마다, 어쩌면 언니가 아니라 내가 그 몫을 받았어야 했던 게 아닌가, 나의 가족은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젓가락보다 더 날카롭고 뾰족해진 언니의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것은, 언니에게 내가 만든 가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빚진 자의 마음이 내내 남아 있어서였다. 지우면 사라질 것처럼 굴었지만, 글을 쓰겠다고 덤벼보는 날엔 어김없이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는 신의 자식이 되었고 나는 세상의 자식이 되었다. 그것은 고아의 다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