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되는 쓰기
모여서 쓰기의 즐거움 혹은 유익에 대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언급했다. 고파의 제안이 새삼 고마워진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보다 훈련되는 느낌이다. 뇌 구조와 집중력 같은 것이 쓰기에 맞게 키워지는 기분이랄까. 모여서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집중의 시간이 좋다.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가는, 그리고 쓰기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티켓이 필요하지 않다. 아니, 티켓은 필요하다. 모여서 쓰려면 적어도 나 이외의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 그가 나의 티켓이 되어준다. 그 없이는 소용없다. 혼자서는 모여서 쓰기가 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 오늘은 나의 티켓, 소중한 티켓을 쥔 이가 무려 두 명이다.
여기 오기 전까지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공감할 수 없는 내용, 문체는 목소리라는 것, 쓰는 동안은 내내 괴로움과 일없음, 허망함, 상실을 견뎌야 하며, 자신을 독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결국은 쓰지 않고서는 모를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도움이 되었던, 내가 좋았던 부분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하는 나의 이 일이 그저 의미 없는 작업은 아니라는 것. 그런 것의 위안을 책이 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노 작가의 말이 담긴 책.
책으로, 강연으로 그런 지지를 받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혼자서는 힘이 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쓰여 있는 글자로 받는 ‘지지’ 보다 누군가의 살아있는 언어로 듣는 조언과 충고가 더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하다. 내 옆에서 앞에서 타자를 두드리고 사각사각 글을 써 내려가는 나의 동료들이, 그 존재가 힘이 된다. 그들이 내가 빈 여백을 한 칸씩 채우는 것을 도와주고 그리고 이것이 절대 의미 없는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책장 한편에 쌓여 있는 글일지라도, 어느 때엔가 어디서고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해서 모여서 쓰기가 주는 유익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함께 하면 참 좋은데, 그걸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랑도 연애도 글로 배울 수 없듯이 글쓰기도 글로만 배울 수 없다. 쓰는 행위를 통해 얻는 뭔가가 있다. 설사 그게 공허한 단어의 나열뿐이라 해도. 단어와 단어를 배열하고 문장을 직조하는 그것이 절대 쓸모없는 일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나라, 살아있는 나라. 아득한 모래사장 한편에서 왕국을 건설하는 꼬마를 상상한다. 양동이에 가득 모래를 담아 물을 섞어 단단하게 다져 다시 엎는다. 벽 하나, 또 하나, 또 하나의 담을 이루어 만든 모래성이 하나일 때도 빛나지만, 그 옆에 또 다른 꼬마가 재밌어 보이는 그 놀이를 함께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벽돌을 쌓고 조개껍데기로 장식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성이 옆에 완성되고, 또 다른 꼬마가 구경하다 모래밭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 상상. 우리가 모여서 쓰는 것이 경쟁이 아니라 각자의 놀이가 되고, 행위가 되는 상상을 한다. 갑자기 복분자 주 광고가 생각나네. 참 좋은데, 이거. 말로 할 수도 없고. 하던 광고 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