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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05. 2019

12월

연말이다. 어느 때 부터였을까 더듬어보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 어느 때부터 나는 올해가 2017년인지, 2018년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매년 다이어리를 (카페나 지인으로부터) 받아서 쓰지만, 년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그리고 가끔 나이도 헷갈린다. 어릴 때 엄마가 그 집 아무개가 몇 살이었지, 매번 나에게 물을 때 마다 왜 그걸 기억 못하나 했는데 지금 내가 그렇다. 기억할 것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일까. 매일의 날짜는 헷갈리지만, 달이 바뀌는 것은 잊지 않는다. 적어도 30일 동안은 보내야 하는 숫자여서 만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365일을 보내야 하는 년도에게는 할 말이 없잖은가) 달이 바뀌는 것은 해가 바뀌는 것 보다 빠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숫자로 헤아리기도 해서 그런가보다. 

12월이 오기 3일 전에는 남편의 생일 있다. 그리고 12월이 오고 3일이 되면 동생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있다. 기념일 시즌을 지나고 나면, 이제 연말 분위기 물씬 이다. 송년회 약속이 (드물지만) 잡히기도 하고, 해가 바뀌기 전에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성탄절 선물을 기대하고, 성당에서는 성탄제 행사가 열린다. 

12월은 그런 일들이 있어 설레기도 했는데, 이제는 설렘보다는 행사를 하나씩 마무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크다. 임무 완수, 하나씩 밑줄 긋듯 해 치워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12월이  전처럼 좋지 않다. 기대보다는 책임, 내가 뭔가를 해 줘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이 해를 넘기며 더해진다. 그래서 나이 따위 잊고 싶은 마음에 해도 자꾸 까먹는 걸까. 

올해 12월 역시 굵은 일들이 포진해 있었다. 연말 분위기에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송년 모임 약속을 잡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렇지만, 다들 건강하게 살아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반가운 일이다. 

2017년 12월에는 존재했으나 2018년 12월에는 사라진 많은 어떤 이들, 무엇들을 생각한다.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니까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서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것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마 전 집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까지 송년 모임을 다녀왔다. 광역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간 옛 동네. 가는 길은 힘들었다. 차는 막혔고, 히터는 너무나 강했고, 매연 냄새와 사람 냄새가 뒤섞인 버스 안에서 멀미를 참느라 혼났다. 거리를 밝히는 다른 계절 보다 화려한 불빛들, 별 모양, 눈송이 모양, 빨강, 초록, 주황, 파랑의 전구들을 보며 물을 마셨다. 나무가 힘들겠지만, 12월만 누릴 수 있는 분위기가 가로수에 걸려 있었다. 거리 속, 사람들은 뭔가 조금 안도하는 것도 같았고, 설레는 것도 같았고, 흥분한 것도 같았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움은 없어 보였다. 스파클링 와인과 캔 맥주를 섞어 마시고 돌아오는 지하철의 불빛이 지나치게 밝았다. 붉은 얼굴이 부끄러워 외투 속에 얼굴을 파묻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같은 곡이 다른 목소리와 다른 장르로 끝없이 이어지던 십 여분.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운동화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까딱까딱, 남색 스니커즈 역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내가 듣는 노래랑 같은 곡은 아니었다. 그의 발은 내 귓가의 음악 보다 좀 더 빠르게 왼쪽 오른쪽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문득, 어떤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과 같은 박자를 맞추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가 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음을 알아차리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꿈 꿀 수 있는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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