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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05. 2019

술을 잘 마시고 싶다.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하는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그런 사람은 아니고 싶다는 것이 담긴 바람이다. 사실 나는 얼굴이 (심하게) 빨개지기는 하지만 술이 약한 것은 아니다. 술이 몇 병 돌아간 후에, 적어도 멀쩡히 걸어 집으로 들어와 얌전히 잘 수 있다.

술을 정말 좋아하는 후배를 안다. 뭘 하면서도 늘 술을 마셨다. 영화를 볼 때, 글을 쓸 때, 방 안에 혼자, 누군가를 만나 항상 술을 마셨다. 그러곤 다음 날이 되면 생오이를 먹었다. 그게 해장이라고 했다. 어느 날, 그 후배가 말했다. 가장 좋은 안주를 찾았어!

후배가 발견한 유레카 급의 안주는 따뜻한 물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따뜻한 물을 같이 마시면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주보다 술을 더 먹고 싶은 그 아이를 알기 때문에 이 발견은 신뢰도가 높았다. 그래서 나도 이후부터 따뜻한 물을 마신다. 덜 취하기도 하고 다음 날 속도 편하다. (아무래도 물로 채워진 배에 안주를 못 채워서 일 듯)


한참 술을 안 마셨었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뭔가 타락과 방탕을 의미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맛이 없었다. 일단 쓰고 삼키면 목구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싫었다. 술자리는 좋아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고 놀았다. 술 마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을 거다.

남편(당시 남자 친구)은 술을 잘 마셨다. 술자리가 잦았고, 같이 어울렸고, 그러면서도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 서른 넘어 술을 배웠다. 낮에 식사를 하면서 곁들이는 맥주 한 잔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그렇게 읽었지만, 해 볼 마음은 들지 않았었는데 일본에서 오래 살다 오신 분이 가르쳐주셨다. 튀김요리를 먹을 때 맥주 한 잔. 하루키 양반이 굴튀김에 맥주를 이야기할 땐 몰랐다. 입안 가득 채워진 기름의 미끈함을 톡톡 쏘며 씻어주는 맥주 한 모금의 알싸함.

그리고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한 여름밤, 맥주를 마셨다. 그의 소설은 반이 맥주 이야기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체국, 여자들,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읽으면서 치나스키가 마신 맥주들에 취해 밤이면 맥주 캔을 땄다. 이제 더는 커피가 어른의 음료가 아니듯, 맥주 또한 쓰지 않았다. 씁쓸한 맛 뒤에 따라오는 청량함을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실 줄 아는 것은 이제 풍류와 정취를 아는 한량의 무엇 같아 좋다. 그리고 어른이 된 것 같아 좋다. 갇혀있던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 같아 좋다. 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아 좋다. 술을 마시고, 취한 기분으로 웃는 밤에는 그런 기분이 든다. 이제 진짜 (나이 마흔에) 어른이 되었구나. 뭔가를 해내야 하고, 뭔가를 해야 했던 시절에는 될 수 없었던 어른의 맛.

그런데 그걸 이제 알았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재밌었을까, 아니면 더 빨리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이제는 좀 덜 빨개질 수도 있었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좀 아쉽다. 얼굴이 빨개지는 건 몸속에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들었는데, 보다 어릴 때 자주 마셔주었더라면 없던 효소를 지금쯤엔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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