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첼로
첼로 첫 레슨을 받았다. 30분여의 시간 동안 활을 잡고 현을 켰다. 첫 수업인데 이렇게 진도가 빨라도 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성인 덩치 만한 첼로를 안고 도(C) 솔(G) 레(D) 라(A) 음을 냈다. 당연히 활을 잡고 켜는 것은 95퍼센트 선생님의 힘이었지만, 심장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도(C)현의 떨림은 내 몫이었다.
학원의 연습용 첼로를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는 덩치에 압도당해서 아, 그냥 집에 있는 피아노를 다시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첼로의 진짜 목소리(선생님 말씀)라는 도(C)현을 느꼈을 때는 그래도 이렇게 와서 덜컥 등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건 바로 이 떨림, 울림이었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 따라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체르니 100번이 끝날 무렵 그만뒀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플루트를 배웠다. 악기는 어릴 때 배우는 거 아닌가 싶었던 생각이 그때에도 있었다. 당시 아빠는 생전 처음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하고 직장을 옮기는 등 여러 가지로 들뜬상태였다. 해서 오래도록 벼르고 있던 '자식에게 악기 가르치기'까지 실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플루트를 동생에게는 피아노를 사주며 레슨 선생님을 불렀던 걸 보면. 집이 생겼고, 자가용이 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식들을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바라보고 싶었던 중산층 로망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플루트를 배우고 싶단 말을 한 적도 없었고, 굳이 뭔가 악기를 배워야 한다면 클라리넷 소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거실 탁자 위에는 반짝이는 은빛 야마하 플루트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보고 설레어했던 건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었다. 해서 억지로 플루트 레슨을 일 년 반 정도 받았다. 고3이 되어 좋았던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레슨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취미도 열정도 흥미도 없이 일 년 반을 이어간 악기였지만, 그래도 나에게 남겨진 게 하나 있다면 음악을 듣는 마음이었다.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심장, 감수성, 그런 것들이 유산처럼 남았다.
현악기 소리, 바이올린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묵직한 첼로나 콘트라베이스의 음에 내 심장 역시 공명 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런 몸의 반응을 스스로 느낀 날이었다. 영화 속에서 잘 연주하지 못하는 첼로를 끙끙거리며 거듭 연주하는 장면을 본 순간, 저 악기는 한 번쯤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초록의 잔디밭에 홀로 앉아 연습하던 연주자는 영화의 배경에 불과했지만,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장중하고도 깊게 영화 속을 걷고 있었고, 현의 울림은 내 심장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렇게 20여 년쯤 됐다. 마음에 품고만 산 지. 한번쯤 마음먹었을 법도 한데, 입안에 오래 물고 있었더니 잘 삼킬 수 없었다. 그러다 꿀꺽, 넘겼다. '더 늦기 전에'가 아니라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이기 때문에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치고 선생님이 더 급하신 게 아닌가 했는데(아이가 바이올린 배울 때 활 잡는 연습만 한 달 했는데!) 성인일수록 지루할 틈이 없게 해야 그만두지 않아서 진도가 빨리 나가는 거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으니 악기부터 마련해야겠단 결심이 선다. 20년 만에 만났는데, 금방 헤어지면 안 되니까.
202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