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힘

매일을 적는 힘, 매일을 걷는 힘

by 산책

"정말 부끄러운 실수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인생의 열 하루가 기록되지 않은 채 수도꼭지의 물처럼 흘러 사라져 버렸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말을 떠올리며 일기장을 펼친다. 이 구절은 '아티스트 웨이' 모임을 하던 중 친구가 읽어줬는데, 며칠 전 일기를 쓰다가 기록하지 않은 감정이 물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일기와도 맞닿아서 듣자마자 수첩에 적어 뒀더랬다.

2019년과 2020년에 친구들과 아티스트 웨이 모임을 했다.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는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12주의 작업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한 주 분량의 매 챕터마다 과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과제를 혼자 12주 동안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아티스트 웨이 모임 선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시 모임을 만드는 중이었고 나는 그 멤버 중 한 명에게 (이것이 동시성인가 싶게) 마침 '아티스트 웨이' 책을 선물 받았던 터였다. 이 책에서 창조성을 깨우는 작업의 하나로 강조하는 것이 '모닝 페이지 쓰기'다. 원칙은 간단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조건 3장 분량의 '무엇'을 쓴다. 밤 사이 묻어 둔 내 안의 맨 얼굴을 글로 마주하는 작업을 12주 동안 매일 반복하는 것이 아티스트 웨이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이 된다. 일기와는 조금 결이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쩌면 일기의 다른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이 작업이 반복되어 쌓일수록 잊고 지낸, 혹은 외면했던 창조성이 깨어난다고 줄리아 카메론 여사는 매주 분량의 챕터에서 강조하고 숙제로 확인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밤에 쓰던 일기를 아침에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가, 바쁜 아침 시간에 일기를 쓰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가, 세 장을 채우지 못해서 좌절했다가, 할 말이 떨어져서 공책을 펼쳐두고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가 결국 모닝 페이지가 아니라 나이트 페이지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매일을 쌓는 일은 쉬워 보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은 거저 주어진 것 같지만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지난한 내적 갈등(자자, 쓰자, 아니 잘까? 그래도 쓰고 자야지, 아 몰라 내일 쓰지 뭐) 이 동반된다.

그렇게 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동료라고, 아티스트 웨이 선배님들은 재차 강조하셨다. 서로를 격려해주면서, 서로의 숙제(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를 점검해주고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걸 서로가 거울이 되어 확인하고 그렇지만 또다시 걸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바로 동료로부터 나온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손바닥보다 조금 큰 공책에 아끼는 만년필을 들고 매일을 적어나갔다. 미운 인간, 나쁜 인간, 쓰레기 같은 감정부터 새로 떠오르는 이야깃거리, 듣고 있는 음악, 어제 만난 노을 등등. 매일 앉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분량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세 장을 채워보려 노력했다. 만트라 같은 구절을 반복해 적기도 하고 (분량 채우기 수법)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내용보다 분량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량만큼의 내용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나서 느낀 상실의 시간, 극복되지 않을 슬픔,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의 시간 동안 나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었다. 아티스트 웨이 모임 같은 동료가 필요했다. 나보다 먼저 길을 경험한 선배들의 이야기가 절실했다. 위로 보다 알고 싶었다. 내가 경험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의 일기는 내 것이 되었다. 내 것은 또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기도 했다.

그 시간들 속에 일기가 있었다. 아침에 적었던 일기, 술에 취해 눈물을 쏟으며 썼던 일기. 그렇게 일기에 적었던 어떤 것들이 다시 나를 일으켜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 이를 테면 피아노. 그래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건축가, 양조장 직원,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 첼로 연주자'라고 대답했다고, 작년 가을 일기에 적혀 있었다.

일 년 전,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는 몰랐던 생의 유통기한을 절실하게 깨달은 일 년 후 가을에 나는 덜컥 첼로 학원에 등록했다. 이번 생에 건축가라는 직업은 가질 수 없지만 건축가만큼 드로잉을 할 수는 있을 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린다. 내가 다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 준 것은 매일 써 내려갔던 일기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사라지는 감정을 새기기 위해 했던 일이 결국 시간을 지켜 주었고, '수도꼭지의 물'을 양동이 받을 수 있었다. 해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매일을 적는 힘은 매일을 걷게 해 준다. 새롭게, 그리고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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