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기 위하여

일기에 밑줄 긋기

by 산책

뭔가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날은 일기를 쓴다. 웹서핑을 하고 책을 들여다 보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엉켜 있을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상 앞에 앉아 결심한다. 일기를 써야겠어! 쏟아지는 생각들, 쏟아질 것처럼 뻑뻑해진 눈동자를 가만히 잠재울 수 있는 순간은 바로 눈을 감고 자판을 치며 일기를 쓸 때다. 물론 펜을 잡고 노트에 일기를 쓰기도 하지만, 눈을 감고 하는 건 앞쪽이 더 낫다.


의욕 넘치게 작업실에 와서 커피를 내리고(손꼽히게 맛있는 원두를 볶는 사람이 작업실 실장님), 아이폰으로 음악을 틀어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게 하는 전나무 이파리 색의 초를 켜고 앉아서 (뒷말은 생략한다) 일기를 쓴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두고는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기어를 D로 바꾸지 못하고 핸들만 붙잡고 앉아 있는 것 같다. 나간다고 나왔는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뒤적인다. 몇 가지 것들의 마감을 확인하고 원고를 들춰보고 급격히 떨어지는 의욕의 뒷덜미를 붙들고자 하는 일은 일기 쓰기다.


일기라는 장르야 말로(장르가 있다면 일기 문학) 형식과 내용과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의식의 흐름이든 하루 일과의 나열이든 뭐든 쓰기만 하면 되는 데다가 남의 일기장 엿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드문 것이니 이보다 사랑받을 장르가 또 있겠나. (하며 일기를 찬양하기 이른다)


일요일에는 전날의 과음을 핑계로 해장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평양냉면까지 먹고(마시고) 들어오는데, 사랑하는 커피집과 애정 하는 냉면집은 왜 다 집 보다 먼 것인가(한강을 건너가야 하는가) 하며 다시금 살고 싶었던(뜨거웠던 마음이 한 김 빠져 미지근도 아닌 상태가 된) 동네들을 떠올렸다. 그곳들은 영혼의 고향으로 남아서, 나는 종종 동네마다 (마음의) 단골집을 만들어두고 핑계 삼아 고향 가는 마음으로 다녀오곤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 관계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한 곳들은 반갑지만 이제 갖고 싶단 마음은 사라졌다. 우리 동네에 이런 가게 같은 마음속 외침 따위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건 아마도 동네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헛헛한 마음을 채우러 밖을 돌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지금은 어느 정도 내 안에 뭔가가 채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18년 8월 어느 밤에 휘영청 달 밝은 성북동 길을 걸으며 쓴 일기가 있다. 책 <아티스트 웨이>를 보면 지난 모닝페이지에 밑줄을 그어보라는 과제가 나오는데, 그래서 나도 한 번 해 봤다. 일기에 밑줄 긋기. 일기에 밑줄 긋는 일은 오래 전 지도와 나침반을 처박아 둔 배낭에서 꺼내는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걸어온 것 같지만, 실은 방향이 존재했다. 지도의 파란 동그라미와 나침반의 바늘이 향하는 곳은 이미 전 부터 표시해 두었던 것.




'달 좀 봐요, 너무 예쁘죠!'라는 말에 올려 단 본 어제의 달. 가로등처럼 전봇대에 휘영청 걸린 달을 등 삼아 혜화동 성곽길과 성북동, 특히 좋아했던 간송미술관 가는 길을 걷다가 결국 치킨 먹고 맥주 조금 마시고(마늘 통닭 너무 매워...) 또 걸어서(왜 걸었을까) 돈암동에서 버스 타고 집에 왔다. 한남대교 너머에는 스무 살 언저리까지의 내가 있고 동작대교를 건너면 서른 살 너머의 내가 있다.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리를 건널 때 그렇게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이 있다. 좋아하는 많은 것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제는 문득 '저쪽에도 좋아하는 것을 많이 두고 있다'라고 달리 생각되었다. 그래서 수고로움쯤은 기꺼이 감수하며 달려갈 수 있는 거라고. 가까이 둔다고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조금 불편하고 어렵고 수고롭더라도 그런 마음, 애를 쓰는 마음이 좋은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거라고.




그리하여, 북극성을 마주한 기분으로 마감 날짜를 차곡하게 달력에 적어두고 하나씩 번호를 매긴다. 답은 없고, 결과도 알 수 없지만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지금 내 생활 바깥 강 건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떠올리며 애를 써 보기로 한다. 그쯤이야 얼마든 할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