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by 산책

아버지가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다. 스무 살 이후 몇 번이고, 자주 생각해 본 상황이었다. 그때 했던 숱한 상상은 가보지 않고 그려 본 낯선 도시로의 여행 같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연습했고 그래서 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니까 슬픔 같은 것은 그래서 흘리는 눈물은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단순히 어떤 하나의 마음, 한 종류의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함이 뒤엉킨다. 아버지의 죽음에는 슬픔만이 들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로 선을 긋고 싶었다. 아버지와의 애증 중, 한쪽으로. 사랑 혹은 증오. 어떤 쪽이든 더 많은 지분을 가져가길 바랐다. 자신 있었다. 지는 쪽으로 배팅 할리 없잖아, 내가.


아버지가 없다는 것, 더 이상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순간순간 나를 울컥하게 한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타자를 치다가도,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나는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울게 한다.
그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쉬고 있는 숨과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 까딱하지 않던 손가락. 그 보다 더 이전 시간 속, 굽은 등과 심장 수술 후 절뚝 걸음이 된 다리와 지팡이. 천천히 걸어갔을 그의 귀가 길이 상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반복해서 떠오른다. 그날 나는 거기에 없었고, 보지 않았지만 그가 살아있었던 2020년 3월 23일 오후 4시가 자꾸 떠오른다. 곧이어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나를 지배한다. 발끝까지 저릿하다. 점차 한 편으로 기우는 화살표에 경고등이 울린다.

해서 나는 부득부득 그가 나에게 했던 치졸한 행위들, 옹졸한 발언들, 상처를 주기 위해 날을 세웠던 날들을 떠올려본다.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으려 그런 장면들,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그가 강요했던 엘리트주의와 자주 받지 못했던 칭찬과 스무 살 이후 나에게 짊어지게 했던 짐들을, 삶의 무게를. 갖은 핑계와 허울 좋은 말로 자신이 도망갈 길을 뒤에 두고 나를 설득했던 일들을.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수를 다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걸 몰랐을 그의 애처로운 설득은 종내 나에게 졸렬함으로 남았던, 그 역시도 몰랐을 그때를. 하지만 사건이 뿌옇게 뭉개지면서 또다시 생각난다. 아이들 저녁을 해 먹이고 설거지를 마치고 앉았을 때, 더 이상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과 노인의 어깨와 자신을 귀찮아하는 자식의 목소리 너머 들려오는 손주들 목소리를 들으려 망설이다 전화했을 주름지고 뭉툭한 손이. 그가 살아있다면 걸려왔을 저녁의 전화가.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걸어갔을 길들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려진다. 우리가 자주 오고 가던 중앙공원과 아버지가 좋아해서 사드렸던 커피와 빵과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던 아이가. 아버지가 낮 시간을 보냈던 도서관과 산책길이. 끝내 끊지 못했던 담배가.


아버지가 없다는 것,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 아버지의 죽음.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주며 걸어가던 어느 오후와 손주들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던 목소리와 멀리서도 알아차리는 희끗한 머리의 뒷모습 같은 것들이 한 상자에 담겨서 시시때때로 튀어나와 가슴을 치는 것. 일부러 미운 기억들을 뒤져보지만 사랑받았던 순간과 한 사람의 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금세 손에 잡히는 것.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로구나. 괜찮을 줄 알았는데, 별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자다가도 눈물이 나오는 것이로구나.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게 되는 것이로구나. 참았던 시간들이 서서히 터져 나오는 것이로구나.


어떤 골목에서 어떤 기억을 마주할지 모르겠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 나의 자만은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져도 나에게는 차갑게 식어 눌어붙은 사랑이 전부이니 슬픔 정도는 빠르게 털어낼 거라고. 하지만 처음 도착한 도시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만난다. 예상해 본 적 없어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낯선 감정들이 그렇다. 잊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잊히지 않았다고 불쑥 어깨를 잡아 흔든다. 불량배처럼 나타나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나를 잡아 거꾸로 흔들어 동전 하나까지 털어낸다. 나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채 그들의 발길질을 견딘다. 식었던 사랑이 터진 피로 데어지고, 자만은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애와 증, 나는 애가 별로 없으니 증이 남아 쉽게 이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증은 눈물로 묽어지고 소금기 가득한 애가 남았다. 한쪽의 지분이 많길 바랐던 것은, 그래서 쉽게 털어버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은 어리석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이제부터 다른 세계를 살 게 되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