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뻥 뚫린 남자처럼 상록수역 앞에 서서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
김연수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 이후 터널에서 목소리, 정확히는 노랫소리를 듣는 남매의 이야기다.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나고, 남매는 엄마가 불렀던 프랑스어 노래가 들릴 때까지, 반복해서 터널을 통과한다. '주쌩뚜디피니,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안다.'
애도에도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숱한 책들이 있지만 막상 들춰볼 마음은 없다.
산책을 나가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지도 꽃구경을 하지도 않는다. 끼니를 말하는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침잠한다. 쌀을 씻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문득 생각한다. 아버지의 목소리. 살갑게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사이가 아니었다. 애교도 없었고, 우리의 소통은 오직 목소리였다. 말투, 소리, 억양. 그런 것이 그리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있다. 뻥 뚫린 심장에 무겁고 커다란 뭔가가 턱 하니 자리 잡았다. 그게 밤새 나를 누른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건 다른 얘기다. 세상에 나를 존재하게 해 줘서 고마운, 그런 근원과는 다른 이야기. 감사니 고마움 같은 말은 결국 자기 위안이고 이기심의 끝장이다. 아니 어쩌면 나약함의 반증일 수도. 감사하지 않다.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누구의 의지도 아니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과연 감사할 일인지는 세상에 태어난 이들이 만들어낸 자기 최면, 정신 승리를 위한 주문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이들의 말을 들어본 적 없으므로. 그러니까 감사해서 그리운 것은 아니다. 고마울 것도 없다. 그런 것은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상실은 다층적이고 심층적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한 묶음의 머리카락을 헤쳐 내 가닥가닥 개별성을 찾아내는 것, 어쩌면 그게 내 애도의 방법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이란 단어에 하나의 감정 만을 줄 긋기 할 수 없다. 그리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비슷하게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경험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상실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므로, 누군가를 이해시킬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저 목이 매일 뿐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코 끝이 아려올 뿐이다. 듣지 못하는 목소리, 들을 수 없는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