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는 그림

되는 대로 일기

by 산책


여름, 길쭉한 해가 들어오는 카페에 앉았다. 불투명한 창 쪽으로 하얀 햇살이 스며들고 초록이 파릇한 이름 모를 식물이 나란하게 이웃한 창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고 있던 펜으로 쓱쓱 그림을 그렸다. 그래, 친구가 말했지. 산책의 선이 마음에 들어! 이 말이 한 달 동안 걍그리세를 하면서 나에게 오래 남은 모양이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마음이 갈팡질팡 돌아설 때 자, 이쪽으로 가봐,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선만 그리면 되는 거야. 이제 뭘 그리지? 뭘 그릴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색을, 그것도 밝은 색 물감을 찍을 수 있을까 할 때, 나에겐 또 다른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산책, 점이라도 찍어. 점만 찍으면 돼.


마흔이 넘어서 아버지를 잃어도,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몰랐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전했을 때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제 다 컸잖아. 커서 괜찮잖아.'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지. 이제 뭐 다 컸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매일, 시시각각으로 크기를 달리하는 상실에 나는 길을 잃었다. 심장이 아팠고, 아픈 심장은 나 밖에 모르므로 나는 나를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 고통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어느 날은 덜 아팠지만 모든 날 숨 쉬기 힘들었다. 잠들기 어려웠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저녁밥을 짓다가도 나는 울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워서,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진 한 사람의 삶이 가여워서, 내가 인정해주지 않았던 당신의 최선에 미안해서, 어떤 날은 울 수도 없었다.


그런 날들에 그림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보내고 온 날 앗쭈가 그린 그림 속 나의 아버지는 지팡이도 없이 철쭉 꽃밭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밝고 환해서 마음이 지옥 같은 날, 부러 들어가 그림을 보며 나를 울렸다. 부디 그림 속 노인처럼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랬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하지 못했던 후회와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분간할 수 없는 색이 되어 나를 덧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아래 누워 가만가만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일 뿐이었다.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었다. 볕이 스며드는 창가에 앉아 비추는 그림자들이 선을 만들었고, 그래, 그때 친구가 말했지. 산책은 선이 좋아. 나에게도 좋은 게 있다고, 힘들어도 좋은 것들이 있어 나를 견딜 수 있게 하지. 내가 가진 좋은 것, 둥근 타원 위에 길게 뻗어 나가는 선을 그리고 잎사귀를 달았다. 노란 원을 그렸던 걍그리세의 첫 시간을 떠올렸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퍼져나가던 노란 무리들. 굳은 붓을 들어 물을 듬뿍 적시고 부드러워진 붓으로 노랑을 살살 쓰다듬었다. 자, 가자. 이제. 또 다른 시간으로. 다정한 위로와 따뜻한 환대의 기억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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