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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달리기를 말할 때

달려라, 산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계절을 건너 뛴 것만 같은 날씨였다. 전 날 낮의 뜨거움을 잊게 할 만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을 잊고 가을이 온 것처럼. 뛰기 좋을 것 같았다. 조거팬츠에 에어팟을 챙겨 나갔다. 초등학교 담벼락의 그늘 아래를 걸으며 에어팟을 귀에 꽂았는데 충전이 다 된 모양인지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폰 화면을 열어 확인해 보니 12%. 실망은 좀 됐지만 날씨가 다 했으므로 벚나무 터널을지나 대공원으로 향했다.


달리기 앱을 실행하고 500미터 쯤 뛰자 햇살이 강렬했다. 좀 더 뛰었다. 등이 바싹 타 들어갔다. 오마이갓, 이제 이 시간에 뛰는 건 안되겠군.


1.4 킬로미터를 뛰고 철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날이었다. 뭘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 받을까 말까 했던 전화로 생긴 갑작스런 약속부터 문자로 날아온 ‘출판사의 미입금 분 독촉 가이드’ 같은 것, 역시나 담당자는 없고 책임은 미루며 나의 원고료는 대체 언제나 받을 수 있을지 (다들 받아내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구질구질하다) 모를 일인데 퇴근한 남편의 심기도 불편하다. (그도 그의 일이 있었겠지) 게다가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심기도 불편하다. (애도 애의 사정이 있겠지) 그런저런 불편한 마음을 안고 2차 도전을 시도한다. 이런 기분이라면 5키로미터도 달릴 수 있겠어.


그렇다. 요즘 나는 달리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가 하는 그 달리기, 무라카미 하루키 양반이 줄기차게 말하던 달리기, 달리기를 위해 직업을 접은 조지 쉬언이 자신을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그 운동을 내가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나를 잘 아는, 특히나 우리집 양반 같은 사람은 매일 놀라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소싯적에 체력장에서 오래달리기 때문에(매달리기 포함) 20점 만점에 19점을 받은 인간이자, 숨 차게 저 힘든 걸 왜 하냐고, 걸으면 되지, 했던 그리하여 별명까지도 산책이 된 그런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런 내가 매일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매우 잘 아는 사람이 보면 ‘너 왜 그래?’ 라고 되물을 일인 것이다.


아마도 10년 전 쯤, 하루키 씨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김연수의 ‘지지 않는 다는 말’과 조지 쉬언의 ‘달리기와 존재하기’등을 읽으며 나에겐 달려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2016년 일기장에는 새해의 목표 중 하나가 10킬로미터 뛰기 였으니까. (10킬로미터라니, 제정신인가 싶어도 원래 계획이란 건 심히 장대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때는 무려 삼십대였다고!) 그러나 목표는 목표일 뿐, 달리기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아예 잊고 살았다. 그리고 나란 인간, 언제나 그랬듯 급하게 매우 급하게 달리기를 실행하게 된다. 계획도 준비도 없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고, 몸이 무거워서 양재천에 나간 것 뿐이었다. 3년 전에 사 둔 러닝화가 마침 현관 앞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첫날의 기록은 심히 부끄럽지만, 어쨌든 나는 2킬로미터를 뛰(고 걸)었다. (기록을 본 감자(a.k.a 남편)는 분명 뛰었다고 보낸 메시지 였음에도 ‘걸었어?’ 라고 물었다.)


첫 달리기를 한 다음 날엔 허벅지가 내 것이 아니었고, 계단을 내려갈 때 마다 ‘아이고’ 곡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다음 날도 뛰었고, 3일차 쯤 되니 약간 살만해졌는데다가 나의 달리기를 응원하는 인파들이 일파만파 생겨나면서 좀 더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10년 동안 조금씩 적립했던 달리기의 꿈이 만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 저마다의 삶의 속도가 있다는 데 나는 뭔가를 발현하고 실현하는 데 까지 걸리는 시간이 10년쯤(씩이나) 되는가보다. 비가 온 날도 더위가 찾아 온 날도 달려야 할 이유보다 달리지 못할 이유가 백가지도 넘는다고 했던 하루키 양반의 말을 되새기며 신발끈을 고쳐 매고 나갔다. 마찰력 보다 관성, 내가 의지하고 싶은 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오늘 까지 열 여섯 번째 러닝을 했다. 처음 2킬로미터는 조금씩 늘어 오늘은 4.3 킬로미터를 달렸고, 지금까지 뛴 중 가장 속도감이 있었던 러닝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럴까? 아니다. 사실 달리기를 매일 한다고 해서 매일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어떤 날은 전 날 보다 더 힘들고 더 많이 지치는 때가 있다. 삶과 똑같다. 관성이 작용하는 건 반복하는 시간의 무게이지 내용은 아니다. 내용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마찰력을 이겨내면서, 쉬고 싶은 순간을 꿀꺽 삼켜 넘기며 조금 더 힘을 내 보는 것,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어떤 한계점을 넘어 선다. 처음 뛸 땐 400미터도 힘들었는데 이제 2.5킬로미터 까지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당기는 근육이 두려웠던 처음에서 4킬로미터를 넘자 당겨오는 근육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발전, 나아짐에만 초점을 맞추면 바로 내일, 다음의 러닝이 어렵다. 완급 조절이라고 부르는 그것, 오늘 가볍게 뛸 수 있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하지는 않으므로 오늘 적절한 시점에 멈추는 법도 알아야 한다. 무릎은 소중하니까요.


그간 체육공원 트랙과 양재천, 대공원 등을 뛰어봤는데, 그 중 대공원 코스를 선호한다. 오르막도 있지만(힘들지만) 내리막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평지만 달릴 때와는 다른 고도차의 속도감이 있다. 장미원까지의 오르막을 견디면 리프트 하차 지점에서부터 내리막이다. 하지만 이때 속도가 붙는다고 신 나게 달리다간 무릎에 무리가 간다. 페이스조절은 무척 중요하다. (사실 이런 초보에겐 다리 풀리지 않게 페이스 조절은 더욱 필수다.)


달리기를 하며 속도와 거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다. 그간 쓴 일기를 들추니 이 두 단어가 꽤 자주 언급되었다. 처음 목표는 속도에 관계없이 4킬로미터를 멈추지 않고 뛰는 것이었고 이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달리기를 할 때면 기록할 만한 속도랄 것도 없이(쓩쓩 자동차처럼 내 옆을 스쳐가는 다른 사람들) 뛰고 있지만, 그렇게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과 떨어져 조망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뛰고 있지만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는 그런 기분. 그런 내게 우리 동네 철학자께서 말씀하셨다. ‘속도 속에 있던 사람만이 이탈을 경험할 수 있고 그래야 관찰도 가능해요.’   


한 친구의 말대로 나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나를 덮치는 운명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고, 그래서 몸 만큼은 느리게 움직였고, 그래서 숨이 차는 일들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속도 안에 들어온 것 같다. 내 속도가 얼만큼인지 오르막에서는 어느 정도로 달리고 내리막에서는 얼만큼의 속도로 뛰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중이다. 정신 없던 인생의 속도를 지나 몸의 속도를 알아가는 중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순서를 정하는 건 의미 없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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