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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14. 2020

다시, 그러나 처음 내 방

1호실 일기

구 남친(혹은 여친)을 만나러 가는 길 같았다.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언덕과 나란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 이파리는 초록과 노랑이 뒤섞여 아직 밀어내지 못한 앞선 계절을 품고 있었다. 동전을 뒤집듯 돌려버리지 못한 마음이 반쯤 대롱거리는 길 위에서 나는 등 돌리고 떠나왔던 때를 떠올렸다. 한 일 년쯤 됐나. 헤어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가 다시 생각난 거야? 내지는 밤마다 미련 떠는 전화 한 통 없더니, 갑자기 왜? 같은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는 모르겠지. 헤어질 때 아팠던 내 마음과 안타까움을. 무능력한 나를 되새기며 내려가던 언덕길의 운동화를. 준 게 없으니 가져갈 것도 없어 책 몇 권 챙겨 내려온 게 전부였던 그 길을.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갈지, 갈 수는 있을지 조차 불확실했던 늦여름 언덕을 내려오던 나의 뒷모습을.


헤어진 이후에도 나는 몇 번 더 그 집을 찾아갔지만, 1층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힐끔 눈길을 준 게 다 였다. 들어가는 길목에 심어진 나무를 보는 게 전부였다.

스마일 식당이 보이는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서 몇 블록을 더 가는 길에(세어본 적 없네) 여전한 공부방과 정육 식당 간판에 눈인사를 건네고 새로 지어지고 있는 집들에 놀라다가 문 앞에 나와 있는 친구를 만났다. 크게 손을 흔들고 반갑게 들어간 나의 옛 작업실이자 첫 작업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또 다른 작업실은 전보다 새로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파스텔톤 초록이 칠해진 볕 드는 방에는 러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익숙한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창문을 지나가는 햇살이 초록 벽에 남천 나무 흔적을 남기는 방, 이제 이 방이 내 작업실이 된 것이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라고 적기엔 하란다에서 나온 지 일 년 남짓. 하지만 정말로 그 일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더 단단해졌을까? 적어도 작업실이 필요할 만큼의 자리는 만들었고, 그리고 언제고 가겠다는 마음이 생겼으니 지난봄에 썼던 갈팡질팡 일기에서 한 걸음(혹은 세 걸음쯤) 나아진 듯하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나의 방이 생겼고, 그런 나를 십분 이해하고 공간을 대여해 준 친구가 있다. 전처럼 왁자지껄한 입주식은 없어도, 자판을 두드리고 책을 읽는 '일'이 있다.

이 공간의 이름은 '잠시', 그리고 내 방은 일 호실.

 


20201012


p.s 노트북 두고 다녀도 되고, 10분쓰기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상시 대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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