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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There's no finish line

달려라, 산책

1.

'금 밟지 마! 넘어오지 마! 내 땅이야!'

한 책상을 둘이 써야 하는 교실에서 까탈스러운 짝궁을 만나면 연필로 가운데 선을 긋고 조금만 넘어가면 지우개 내꺼, 연필 내꺼 하면서 금 넘은 물건을 가져가는 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그게 뭐라고, 웃기시네?' 같은 대꾸 한 마디 못하고 선을 안 넘으려 조심했던 적이 더 많았다. 네모 반듯한 깍두기 공책의 밖으로 글자가 빗겨 나가지 않게, 조금 더 커서는 유선 노트 선 아래로 벗어나지 않게 글씨를 썼고, 왕복 한시간 반 거리의 등하교길에서 바닥에 그려진 하얀 선, 노란 선을 따라 걷거나 네모난 보도블럭의 모서리 부분을 밟지 않고 가는 놀이를 하곤 했다.


2.

약속이 있어 시내로 나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안그래도 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서로 어디 가는 길인지 묻다가,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는지 찾아봤다. 우리는 사당에서 내려 4호선 지하철로 갈아타고 삼각지 역 까지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보통 그 친구와 만나면  요즘 몰두하고 있는 어떤 문제 혹은 일에 대해 말하고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충고와 조언과 경험과 생각을 나눈다. 우리 사이에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그 친구와 얘기하다보면 책에서 읽은 갖가지 사례들이 나열되고, 나처럼 뭐든 두루뭉술 알고 있는 사람은 친구의 입을 통해 듣는 정확한 단어와 사례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사실 비슷한 구석, 그러니까 비슷하게 느끼는 인생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반성과 반추가 난무하는 하루 일기 같은 일상을 서로 잘 알고있기에 가끔 친구는 내게 말했다.

'반성하지마. 성찰하지마. 그런 거 이제 그만 해.'

그날 친구는 '무책임해질 필요가 있어' 라고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의 첫 장에도 나와있던 의무와 사명의 관계를 두고 생각 중이었는데 친구가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또 눈을 또릿하게 뜨며 '맞아, 그래!!!' 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미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책임은 무수하고, 충분한데 굳이 다른 곳에서까지 그렇게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어? 아냐, 그냥 무책임해져. 가려가면서 하는 거야. 계산적이 되라고.


3.

'의무는 외부적인 것이고 사명은 내면의 소리' 라는 에릭 와이너의 정의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에 더 충실한가를 떠올려보는 중이었다.

사명이라면 이불을 박차고 늦잠을 물리칠 수 있다는 예를 떠올리면서, 그렇다면 내가 사명감을 갖고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것들을 추려서 에너지를 분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어둔 선이 하나 씩 지워진다. 이게 뭐라고, 달리기를 5번 트랙에서 할 때 뭔가 쾌감이 느껴진다(걷기는 5-8번 트랙). 책 귀퉁이 접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내가 우리 동네 철학 쌤을 따라 책에 밑줄을 긋고 낙서같은 필기를 하고 감상을 적고 친구 따라 그림을 그릴 때도, 어제 저녁 설거지를 오늘 저녁에 할 때도, 밤 9시에 연남동 빵집에서 사 온 어니언 베이글을 베어물 때도, 첼로 수업을 쨀 때도, 아침 9시에 일어날 때도!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지 않기로 했다. 피니시라인은 내가 정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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