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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04. 2022

운명론자와 연애하는 법

한바닥 소설집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무척 쉬워. 만약에 네가 부산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쳐. 2박 3일? 3박 4일? 아무튼, 부산에 가기로 한 거야. 그래서 그전에 계획을 세우는 거지. 버스를 타고 갈 건지 KTX를 탈건지, 몇 시에 도착해서 어디부터 갈 건지, 용궁사를 갈 건지, 해운대 바다를 구경할 건지, 점심은 밀면을 먹을 건지, 돼지 국밥을 먹을 건지 같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는 거야. 그렇게 아주 세세하게 2박 3일 여행 일정을 다 세웠다고 치자. 그런데, 여행 계획 다 짰으니까 나는 이제 여행 안 가도 되겠다? 이게 안 되는 거거든. 그게 운명론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왕 기차표도 샀고 계획도 다 세웠으니까 가야지. 가긴 가는 거야. 열차가 연착될 수도 있겠지. 밀면 집이 개점 휴업일 수도 있고, 뭐 깡통시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부산이 난리가 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가는 거야. 지도가 그려져 있지만 네가 거기에서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느낄지는 모르는 거니까. 가서 재밌을 수도 있고 중간에 돌아오고 싶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 너와 내가 이야기하는 이 순간이 계획된 거라면 말이야, 이 얼마나 멋진 ‘우연’이겠어! 주말, 오후의 공원, 햇살 좋은 가을에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예정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오!"


K의 말을 반 정도 알아들었을까. 과거와 미래가 같고, 시간 속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깨달음뿐이라는 그의 말은 얼마 전 읽은 테드 창의 소설 속 이야기와도 닮아 있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럼 뭘 할 수 있겠어? 모든 게 정해진 것이라면 말이야."


책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던진 질문에 K는 긴 대답을, 공원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갔다.

이야기 속 상인은 사업을 위해 먼 길을 떠나던 날 아내와 크게 다툰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말들을 아내에게 던졌다고 후에 고백하는데, 그의 아내는 그가 돌아오기 일주일 전 모스크 벽이 무너지면서 밑에 깔려 사망한다. 그는 후회하면서, 과거로 돌아가 아내를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비밀스러운 상점의 회전문을 수없이 통과해 과거로 떠난다. 그러나 아내를 끝내 구할 수 없었던 그는 다만 아내를 간호했던 사람으로부터 아내가 전한 메시지를 받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생각했노라고, 짧은 결혼 생활의 행복을 전하는 아내의 메시지에 상인은 속죄의 눈물을 흘린다. 지울 수 없는 과거와 바꿀 수 없는 미래, 그러므로 시간의 수직선에는 회개와 속죄, 용서만이 존재한다는 상인의 마지막 말은 마치 경전의 한 구절을 가져다 읽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럼 매 순간 용서를 구하면서 살란 말이야? 나는 좀 화가 나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잘못을 얼마나 저질렀는지도 모르는데, 뭘 또 속죄해. 하여간 이 끝도 없는 원죄의식이란. 그러나 K의 말은 달랐다.


"속죄는, 이 순간에 충실하지 못할 때 해야지."


나는 하마터면 그 말을 하는 K에게 입 맞출 뻔했다.

그렇다면 너와 나는 어떻게 될까? 내가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러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 해도, 너는 그저 그건 운명이라고, 우리는 그런 지도를 걷게 되어 있었다고 말할까? 나는 손을 흔들며 한강 변으로 자전거를 내달리는 K의 긴 그림자에 대고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외에 진짜 인 게 없다는 말이네, 그럼. 알 수 없는 지도를 붙들고 헤맬 수는 없으니 나는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넌 언제든 내가 부르면 맥주 마실 운명이다. 30분 내로 되돌아오지 않는 자, 속죄하며 살아야 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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