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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Mar 29. 2023

선배의 스포

오늘도 일기

"@@이 엄마, 동의서 냈어? 학교에서 무슨 축구대회 한다고 동의서 가져오라더라."

"@@이네 반도 이번에 성적표 주지 않았어요?"

"애들 체험 학습 간다던데, @@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동네 엄마들을 만날 때 마다 이건 또 무슨 소식이고, 나는 또 누구인가 싶게 처음 듣는 이야기 투성이다. 개학하고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대체 얘는 학교를 가고 있긴 한 거겠지? 학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걸 보면, 큰 문제가 있진 않은가 보군. 나는 매일 아침 아이의 방 문 앞에 서서 이불을 돌돌 말아 번데기처럼 누운 청소년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얘가 내 자식이지.


3월이 시작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 알람이 뜬다. 보건 교육 알림, 새 학기 도서 신청, 학교 봉사활동 신청서를 비롯 방과 후 신청 등등등. 정작 그 학교 학생인 아이의 입을 통해 듣는 소식은 거의 전무하고, 부모에게 직접 날아오는 e-알리미 내용만 알고 있을 뿐이다. 축구대회 동의서라던가, 가내신 성적표라던가, 혹은 5월에 간다는 체험 학습 같은 건 모두 내겐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릴 적부터 단답형 대답 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두 어 문장으로 말할 뿐인 이 녀석을 겪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점점 마음이 그렇다. 아이가 만들어가는 세계, 아이가 아는 세계에서 나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아침부터 늦은 시각까지 학업에 지친 청소년에게 어찌 감히 함부로 말을 걸겠냐마는, 그래도 아직까지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다니 다음 날 학교를 일찍 갈거니까 7시에 깨워달라는 아이에게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교는 왜 일찍 가?"

"축구 있어요."

"너희 반 애들이랑?"

"아뇨."

"그럼 다른 반이랑 하는 거야?"

"네."

"체육 대회 있어?"

"아닌데요."

"그럼 왜 시합하는 거야?"

"그냥요."

"경기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한참 침묵)

"(만사 귀찮음) 월드컵 같은 거예요."


흐업.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나는 이 아이를 키우는 내내 이런 식의 단편적인 정보를 조각조각 이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냈던 구력이 이미 십 수년 있는 부모인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사춘기는 갱년기를 이길 수 없었다.


"너는 지금 내가 체육 대회랑 축구 대회를 동일한 걸로 취급했다고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데, 내 워딩은 정확해야 하고 네 워딩은 그렇게 모호해도 되는 거야?"를 시작으로 한 마리의 불을 뿜는 용이 되어 그간의 행실을 다 들먹이며 격렬히 산화... 했어야 했는데 반전은 그 말을 하는 내가 서러움에 울먹였다는 거다. (물론 속으로)


어릴 적부터 말 없는 것으론 늘 장원 급제 감이었던 나는 자라는 내내 엄마에게 집에 오면 입을 다무는 걸로 타박받았는데, 그래 나와 닮은 녀석을 보며 내 피 어디 가겠나 싶다가도 그렇게 입을 다물었던 나의 또 다른 마음에는 사춘기의 반항 말고도 아주 오만하고도 못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세계와도 같았던 아빠가 사실 명예퇴직을 앞둔 만년 과장이고 그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순과 이제 당신을 대신해 내가 가정의 경제적 기능을 감당할 만한 자식이 되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때, 나는 집에서 침묵했다. 그건 무시의 다른 얼굴이었다. 아빠의 전화는 잘 받지 않았고, 전화를 거는 일도 드물었던 것은 어차피라는 마음에서였다. 내가 쉬는 시간마다 강의실 칠판을 닦아가며 단과학원을 다녀야 할 때에도, 교환 학생을 준비하며 모아둔 돈을 동생의 기숙사비와 등록금으로 다 내놓을 때에도, 장학금을 모두 우리 가족의 생활비로 충당해야 했을 때에도 나는 말을 없앴다. 어차피, 아빠는. 아빠는 내게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잖아. 절대로 내 세상을 알려주지 않겠어.


이게 다 내 업보다,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나는 앞으로 닥칠 숱한 업보의 화살을 어떻게 견디나(지은 죄가 많은데)싶어 두려웠다.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또 한 번 변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두려웠다. 우리는 또 이별해야 한다는 것. 손을 잡고 걷지 않고, 등을 돌리고 친구들 무리로 뛰어가고 2박 3일 캠프에 가는 그런 류의 떨어짐이 아니라 아이가 사는 세상과 나의 세상이 이제는 영국과 프랑스 만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아이는 비자 없이 내게 입국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무시로 들어갈 수도 없으나 들어간다 해도 알 수 없을 세계가 저 편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가 만든 세상의 크기가 또 자랐고, 나는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내 지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제는 손절의 타이밍이라는 것.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이별해야 하는가, 유행가 가사가(마침 에피톤 프로젝트의 '그댄 지금 어디에'가 흘러나오고) 다 내 얘기 같은 날이 또 왔다.


그리고 아빠를 생각했다. 신호음만 울리는 무심한 전화 저편의 아빠를 떠올렸다. 엄마가 없을 땐 국만 데워서 밥을 먹었다는 아빠의 점심을 생각했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아기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아빠를 그려봤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불 켜진 우리 집 베란다 창을 한 번 올려다보고 집으로 돌아갔을 아빠와 큰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 집 앞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산책 길의 어린아이들을 보며 껄껄 웃었을 아빠를.  


아빠는 그 많은 이별을 겪고도 나를 좋아했다.

나의 시건방과 오만, 잘난 척이 무색하게 아빠는 나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빠에게도 아이에게도 할 말이 없다. 이별을, 아프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아빠처럼 그냥 웃는 수밖에. 앞으로 더 있을 결별의 순간에도 한 번씩 꼬라지는 부리더라도(내가 사 준 거 다 내놔) 순순히 발을 떼는 수밖에. 인생의 선배였고 나의 아빠였던 이가 이미 자신의 생을 다해 보여 준 스포이자 아빠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경험치의 교집합 같은 것이니 쿨(하고 싶다)하게 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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