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산책

by 산책

산적한 일들을 뒤로하고 조금 걷기로 했다. 아침부터 머릿속은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순서를 정하느라 복잡해졌고,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처리할 생각을 하니 조금씩 짜증이 일었다. 걷기에 좋은 날씨가 그리운 요즘. 어느 때부턴가 날씨를 검색하며 미세먼지 수치도 확인하게 됐다. 청명한 봄의 하늘을 가졌던 때에는 그저 맑은 날, 걷기 좋은 날, 눈이 부신 날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뭔가 불편을 겪고 잃어야만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인가. 있을 때 잘하라고 하지만 함께 하는 동안의 일분일초를 아깝게 여긴다고 해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꼬리를 무는 푸념까지, 이미 머릿속이 여러 말들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럴 때 걷는다. 보폭은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게 좋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각들이 바람에 흩어질 수 있게. 어느새 걸음 뒤에 떨어진 생각들. 그러다 보면 걸러지는 무엇이 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왜 해야 한다는 말 보다 갖고 있는 힘이 더 클까? 예를 들면 다이어트 중이니까 야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밀가루를 먹지 말아야 한다 같은 것은 마음속에서 더 크게 작용한다. 좋은 쪽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말이다. 더 하고 싶고 더 먹고 싶게 만드는 것. 그리워하지 말자, 고 마음먹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헤어져 본 사람은 익히 알고 있다. 친구들이 구질구질해 보인다고 말려도 되지 않는 마음의 작용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걸거나 집 앞에 찾아간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갖는 힘이 그렇다.

반면에 해야 하는 것에도 한없이 관대 해지는 것이 마음이다. 역시나 그 반대쪽으로. 운동을 해야지, 영어 단어를 외워야지, 일찍 일어나야지 같은 것은 대체로 잘 안 지켜진다. 운동은 내일부터, 영어 단어도 내일부터, 내일은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거야. 같은 관대한 약속들을 얼마나 자주 해왔던가.

이쯤 되면 청개구리는 옛날이야기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모두의 유전자에 박혀 있는지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유전자에 콕, 깊숙하게.


자주 가던 길로 걸을까 하다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길이 제법 돼서 선뜻 나서지 않았던 길인데 오늘은 모처럼 다른 길로 가보기로 한다. 자주 반대를 갈구하는 마음처럼. 듬성듬성 머리를 덜 깎은 것 같은 잔디밭 사이로 보랏빛 꽃 무더기가 보인다. 제비꽃이다. 언제 여기에 제비꽃이 지천으로 피었던가, 이 길에 오랫동안 무심했었다. 예쁜 이름도 있지만 '큰 개 불알 풀'로 더 유명한 봄 까치꽃 까지 더했다. 개나리가 막 터지기 시작했고 그늘을 벗어나 있는 목련 나무는 이미 반쯤 꽃을 피웠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가 복슬복슬한 강아지 등 마냥 초록을 머금은 누런빛으로 바뀌었고, 선명한 초록의 작은 잎을 말갛게 내민 버드나무 가지가 보였다. 봄은, 계절은, 자연은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 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을 지나온 것 같지 않게 꽃나무는 싹을 틔우고 땅은 봄의 색으로 숨을 쉬며 산은 겨울 가지를 벗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할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야 하는 'to do list' 중에 몇 번째에 자리 잡은 한 가지. 그러니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또한 하지 않게 될 거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물을 챙겨 마시고 채소를 조금 더 먹다 보면 밀가루도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제발 그리되길!) 사실 어려운 건, 그거다.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 단단하게 언 땅이 녹고 움츠렸던 씨앗이 싹트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꽃망울을 맺기까지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나는 활짝 핀 꽃에만 눈길을 준 것은 아닌지. 산책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쓴다.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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