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남기고 간 것

하루, 견디고 흘러 보내다 보면

by 산책

자동차 종합 검사를 하러 왔다 점심시간에 딱 걸렸다. 다들 저마다의 일을 품고 나왔을 사람들, 앞뒤 운전자의 표정을 살핀다. 나를 비롯한 뒷사람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차 시동을 끄고 내렸으나 검사 순서가 얼마 남지 않은 앞 사람의 얼굴에는 찡그림이 가득이다. 이해할 만한 순간이다. 배차 간격이 십 분 넘는 지하철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그런 기분. 한 발만 빨랐어도, 하는 후회를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다려야 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고 머릿속으로는 기다리지 않았다면 처리할 수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부분은 견뎌야 하고 어느 것은 흘러 보내야 하는 행위다. 두 자세의 공통분모는 마음이다. 견뎌야 하는 것도 마음이고 흘러 보내야 하는 것도 마음이니까. 견디다 보면 마음에 굳은살이 박인다. 손톱깎이로 잘라내도 아프지 않은 굳은살처럼 마음에 새겨진 굳은살은 어떤 기억에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갖고 있는 감정은 조금씩 무뎌진다. 그와 함께 걸었던 공원의 어느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머릿속 녹음기에서 재생되는 그의 말투가 느려지다가 늘어지다가 어느 순간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시간에 쓸려 내려간다. 찰랑찰랑 넘쳤던 감정을 시간이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셔 어느 날은 바닥이 보일 만큼 훤히 비워지는 것이다. 견디는 것과 흘려보내는 일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굳어진 마음을 깎아내는 일, 넘쳤던 감정을 비워내는 일. 기다리는 이들 모두 기다리는 순간.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순간. 딴생각의 틈이 없는 순간을.

그래서 기다리는 일은 어렵다. 견디고 흘려보내는 것 보다 틈을 주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덜 고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바라보지 않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마주칠 감정이 어떤 것인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리다 보면, 견디고 흘러 보내다 보면 가슴에 돋아나는 새 살을 만날 수 있다. 미움과 후회와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 그것이 무엇으로 남든 반짝이는 어떤 것을 만난다. 검사 순서를 기다리며 바깥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2층 창가 의자에 앉아 하늘 마주했다. 잘 닦인 유리창처럼 맑고 파랗게 반질거리는 하늘. 거울처럼 투명한 그것. 입술 자국이 그대로 남은 하얀 찻잔 같은 그것을. 미움 뒤에는 미워한 마음의 용서가, 후회 뒤에는 순간의 최선이, 그리움 뒤에는 함께 한 시간의 고마움이 그렇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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