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

시간을 짓다

by 산책

밥을 짓는다. 매끈한 쌀 알갱이를 찬물에 박박 씻는다. 뿌옇게 흐려진 물을 여러 번 버리고 가스 불 위의 냄비에 씻은 쌀을 안친다. 따라 버리기를 몇 번, 적당하게 맞춘 물에 만족하며 냄비 뚜껑을 닫는다. 불을 켠다. 고스름한 쌀 익는 냄새가 난다. 김이 하얗게 올라오는 고슬고슬한 쌀을 주걱으로 휘휘 저어 섞어주고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밥이 잘 되었는지 먹어 본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뜨끈한 덩어리가 뱃속의 허기를 채우고 몸의 온기를 높여준다.

사는 동안,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꼭 한번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다 쓸데없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에는 또 그럭저럭 잊고 지냈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사랑이기도 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고마운 사람이기도 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할, 누군가.

바란다고 모든 게 이루어지는 마법의 세상이 아니듯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된 때에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살아있어야 하는 사람.

밥을 짓다. 글을 짓다. 노래를 짓다. 시를 짓다. 이야기를 짓다.

허한 위장을 달래고 채우는 하얀 밥덩이처럼, 나는 어떤 식으로든 영혼을 위안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다. 이것은 우리가 살을 부비고 앉아 서로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할 지라도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한가득 이었다. 노오랗게, 하얗게 들어오는 햇볕에 눈이 부셨고, 너무 많은 양의 빛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얼굴이 찡그려졌다. 나는 창가에 앉은 그녀에게 커튼을 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앞좌석 끄트머리에서 햇살보다 흐린 노랑의 조악한 꽃무늬 커튼을 끌어 당겨 창을 가렸다. 그제 서야 눈이 떠졌다. 다리 아래의 히터는 간간이 신발 끝을 세우고 있어야 할 만큼 뜨겁게 나오고 있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없어도 이미 버스 안은 충분히 따듯했다. 그녀는 잠시 의자에 기대는듯하더니 곧 몸을 일으켜 낡은 커튼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창문에 얼굴을 댔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도 계속 그렇게, 한참을 커튼 속에 머리를 감춘 그녀에게 바깥이 궁금한 건지, 아니면 멀미라도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턱을 넘을 때 함께 덜컹이는 어깨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이 아니면 그녀가 그녀인 것을 알 수 없었다.


'아깝지 않아? 겨울 햇살이. 천 조각으로 가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큼직한 꽃이 비집고 나올 것 같은 커튼 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그녀인 것을 알 게 해 주는 무릎 위의 손을 잡고 싶었다. 겨울 햇살을 귀하다고 여기는 이 사람의 손을 잡으면 평생 마음이 겨울 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슬프거나 안타깝지 않다. 여행을 떠나는 동안, 카페에 앉아 연인을 기다리는 동안,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무료한 오후를 보내는 동안, 식당에서 밥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공간 어떤 시간에서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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