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 #08
서두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우리는 이미 어딘가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긴 연휴가 시작되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비어 있는 그릇처럼 느껴졌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른 채 한동안 그 공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산을 다녀온 지인이 건네준 등산로가 떠올랐다. 특별한 결심은 없었다. 다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연휴 마지막 날 오전 늦게 일어나 천천히 집을 나섰다.
산은 도심 한가운데 있었고, 동시에 내게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대학 시절 자주 오가던 동네였다. 익숙한 골목과 건물들 사이를 걷자 오래전의 시간들이 조용히 따라왔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무언가로 바빴고, 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혼자였고,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그 동네를 걷기도 했다. 그렇게 낯설지 않았던 동네를 나는 목적 없이 천천히 혼자 걸었다.
예전의 나는 산에 오르는 이유가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정상에 도착하는 것. 그 외의 시간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어차피 다시 내려와야 할 길이라면 오르는 과정은 견디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굳이 힘들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일을 반복할까. 목적이 끝나면 의미도 사라지는 일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였는데,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스스로 산을 찾아가고 있었다.
산은 초입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졌다. 숨은 조금씩 가빠졌지만 몸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공기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의 겨울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날카롭지 않았고,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섞여 있었다. 아직 봄이라 부르기에는 이르지만, 계절은 분명 겨울을 지나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걷던 도시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아래에서는 거대하게만 보이던 빌딩들도 내 새끼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나는 고작 한 걸음씩 옮겼을 뿐인데 이미 꽤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풍경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 순간 서두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우리는 이미 어딘가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앞만 보며 걷지 않았다. 천천히 걷다 힘이 들면 마음에 드는 곳에서 멈췄다. 눈길이 가는 이정표를 읽고, 작은 나무 설명판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누구의 걸음에도 맞출 필요가 없었고, 시간에 밀려갈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예전에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뒤처지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그 멈춤 덕분에 주변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 멀리서 들려오는 낯선 사람들의 웃음까지 모두 또렷하게 들렸다. 그 순간 내가 보낸 길 위의 시간은 더 이상 목적지로 향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순간이 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여정의 아름다움은 목적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향해가는 동안에도 이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에는 결과가 있어야만 시간이 의미를 가진다고 믿었다. 나에게는 시험이 그랬다. 통과해야만 의미가 있고, 실패하면 모든 노력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노력의 시간이 무효가 되는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지나치게 단단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몇 번의 실패가 삶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경험이 또 다른 성공으로 이어지기는 경우가 더 많다. 만약 그때 도전하고 실패했다면 지금까지 남아있는 막연한 아쉬움 대신 분명한 경험 하나가 남았을 테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노력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안에 남는다. 방금 내가 걸어온 길처럼. 정상에 도착하지 않았어도, 이미 풍경이 달라져 있는 것처럼.
산 중턱 길가에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지 끝마다 단단한 몽우리가 맺혀 있었다. 아직 꽃망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미 피어나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겨울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는데도, 나무는 조용히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봄은 이미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