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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지원 Feb 28. 2024

발견되지 않은 사람

간절함은 마침내 응답받는다

친구를 따라 오디션장엘 갔다가 얼결에 캐스팅된 톱스타의 '그 친구'가 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지. 내 시간과 삶 속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나에게 유일한 것에 공을 들여 노력했음에도 끝끝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결과를 승인받지 못할 때 말이야. 유독 먹구름이 내 머리 위에만 가득 머무르고 떠나지 않는 것 같잖아. 순간 나는 이해 받지 못하고 마치 이방인처럼 주변을 맴돌며 소외감을 느껴버리곤 해. 희비가 엇갈린 순간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진심으로 친구를 축하해주지만, 동시에 나는 무엇을 한 걸까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그러곤 생각해 보는 거야. 톱스타의 '그 친구'의 마음을.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서 건네지는 공감만큼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있을까 싶어서.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혹은 재능이 있는데 왜 나를 보아주지 못하는 것이냐며 독기를 가득 품고 나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었을까? 훌훌 털어버리고는 다음 기회를 준비하며 담담하게 나 자신과 나의 여정에 집중하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이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며, 나의 무능함을 탓하며 비관에 빠져 버렸을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 모두가 공유하는 취미를 나 혼자만 하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마치 사과나무에 매달린 유일한 귤이 된 처지인 것이지. 그럴 때도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된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해.


그럴 땐, 나를 위한 다정하고 긍정적인 말을 되뇌며 내 머리 위 먹구름을 뽀얗고 하얀 구름으로 만들어 봐. 흙먼지가 담겨있는 그릇에 폭포와 같이 물을 세차게, 끊임없이 쏟아부어 맑고 투명한 물만 남게 되는 그림을 상상하며. 그것이 내가 믿는 글과 말의 힘이야.


세상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있어. 이 세상의 틀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말이야. 네가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너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것일 뿐인지도 몰라. 너는 엄연하고도 오롯한 존재이지만, 아직은 너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지. 그래서 때로는 세상의 조언이 너에겐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조언이 만들어진 건 이 세상이 너를 알기 전의 일이야.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는 너의 형태를 보지 못한 눈먼 세상의 오판인지도 몰라.


하지만 무엇이든 정의되는 순간, 이해되기 시작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정상 상태로 받아들여지게 되잖아. 너는 그대로인데, 이 세상이 깨치거나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너에 대한 평가와 수용이 달라지는 거야. 지금 우리가 수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가치에 흠결이 생기는 것은 아니야. 그저 새로울 뿐인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야.


물질의 상태엔 고체, 액체, 기체, 그리고 플라스마가 있어. 기체가 수만℃의 고온에서 전자와 원자핵으로 분리될 때 플라스마 상태가 되는데, 자유로워진 전자가 탈출하거나 옮겨와 전기가 빠르게 흐르고, 매우 높은 에너지가 생성돼. 오로라와 번개도, 우리 곁의 형광등도 플라스마이고, 우주선의 엔진과 핵융합발전에 쓰이기도 해. 가장 뒤늦게 발견된 상태이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결코 말할 수 없지.


플라스마는 지구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태양 같은 별은 플라스마로 가득 차 있어. 우주 차원에서 본다면 플라스마는 거의 모든 물질의 정상 상태인 거야. 제4의 상태가 아니라, 제일의 상태인 거야. 세상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이 있을지도 몰라. 발견되지 못한 채, 역설적으로 이 세상 가득하게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


그래서 더욱 이 세상이 나를 알아봐 주길, 세상과 연결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살고 있다고 말할 거야. 언젠가 고흐가 말했지. 자신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작품을 통해 자신과 같은 기이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고. 그런 비장함도 좋아. 혹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들에게 너무 큰 손해이니 나를 보여주겠다는 뻔뻔함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뭐 어때. 지금 당장은 거절당하더라도, 간절함은 마침내 응답받는다고 생각해.


어쩌면 지금의 기다림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 주기 전에 나 스스로를 알아보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몰라. 사실 인정이라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마실수록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그저 더 마시기만을 바라게 되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한한 인정을 스스로에게 건네고, 덤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생각지도 못한 용돈처럼 받는다고 생각하고는 나 자신에게 무게중심을 두고자 해. 그러니까 내가 먼저 나의 무늬와 모양을 받아들이고 그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것이 어떨까. 사랑에 성실한 연인이 된 것처럼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최초로 발견하는 탐험가가 되며, 스스로 존재의 증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카뮈가 말했지, 인식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건 마치 스스로와 로맨스 영화를 찍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그렇게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사랑하고 기념하는 거야. 그러는 와중에 나의 꿈과 관계를 향해 나아가기까지 하니, 그 소중한 과정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나 자신을 먼저 발견하면 너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나서, 뚜렷한 너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홀로 떠돌던 각자의 우리가 만나 함께 춤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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