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작과 끝을 반복해 마디가 많아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 속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을 함께 했던 그 공간을 말이다.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에서 보내는 것 못지않게,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서 보내는 것 또한 깊은 인상을 준다. 어쩌면 전자는 넓은 인상을, 후자는 깊은 인상을 주는 게 아닐까.
오늘 내가 받은 인상이라는 것은 후자였다. 오랜만에 내가 30년 전에 살던 동네로 출장을 갔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내가 살았던 첫 집이다. 몇 년 전에도 이 동네로 출장을 온 적이 있었는데, 여기로 올 때마다 쉽사리 바로 집으로 돌아가질 못한다. 그렇게 20분은 동네 한 바퀴를 돌다 집으로 돌아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0년은 한 세대가 만들어지는 기간이니 상전벽해가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남이, 해운대가, 혹은 어떤 신도시가 천지개벽을 했다고 한다. 하늘과 땅이 열릴 정도로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신흥 부촌을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많은 외곽 지역이 슬럼화되고 있다. 내가 살았던 이곳이 그러하다.
30년 전, 아니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놀이터는 물론이고 골목마다 나를 포함해서 어린이들이 바글바글했었고, 커다란 초등학교 건물마저 아이들을 다 수용하기 벅차 우리 반은 컨테이너박스에서 수업을 했다가 한 학기가 지나자 몇몇 친구들이 새로 지은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이 동네는 나의 세계였고, 그 세계는 아주 넓었다.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놀거리가 차고 넘쳤다. 그때는 무엇을 해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낙엽이 바닥에 굴러가지 않더라도 그냥 나무에 이파리가 달려있는 것 만으로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내비게이션에 도로명주소를 찍고 이에 의존해 가다 보니 처음엔 이곳이 바로 그곳임을 인지하지 못했다.(내가 거주할 당시는 도로명주소 개념이 없었다)
한때 나의 세계였던 이 동네는 너무 작았다. 길게만 느껴지던 골목길은 너무 짧았다. 횡단보도가 1-2차선인 것도 놀라웠다. 건물들도 대부분 2-3층인 걸 그제야 인지한다. 없어진 것과 생겨난 것도 너무 분명했다.
없어진 것 : 분식집, 수레에서 불량식품을 팔던 아저씨, 초롱문방구, mr.k 팬시점, 훼미리마트, LPG가스집, 수많은 피아노학원, 오락실, 놀이터의 아이들, 놀이터의 모래, 놀이터의 퐁퐁, 학교 운동장의 화려한 무지갯빛 미끄럼틀/철봉/구름다리 등 놀이시설, 어린 시절 친구들
생겨난 것 : 아이스크림할인판매점, 세븐일레븐 외 많은 편의점, 술집, 카페, 산업재 회사들, 놀이터의 노인들, 놀이터 안의 깨끗하고 탄성 있는 보도블록, 학교 운동장의 세련된 은색 놀이시설, 나의 고객님
여전한 것 : 세탁소, 문방구 하나, 내가 처음으로 애플파이를 맛보았던 동네 빵집, 정육점
주거단지가 산업재 상업지역이 된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옆 타이어회사는 정말 이질적이었다. 내가 다니던 어린이집 건물은 간판도 없어 용도를 알 수 없는 상가 건물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동네에 남아있던 어린이집은 오늘 건물을 철거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오백 원을 거슬러주시면서 오백만 원이라고 얘기하시는 사장님이 계셨던 슈퍼마켓은 한 달에 오백만 원은 벌 것 같은 전기재료 판매점이 되어 있었다. 그 슈퍼마켓은 아빠가 일요일 저녁마다 간식을 사주셨던 즐거운 추억이 있는 곳이다. 또한 소풍 갈 때 사 먹던 가수 HOT 소다 음료, 효리 언니 스티커가 들어있는 과자와 포켓몬 빵,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최애 과자였던 미니폴까지 있던, 세상의 온갖 과자들을 만날 수 있던 곳으로, 당시 나에겐 코스트코이자 트레이더스였다.
Mr.k 팬시점에서 산 스티커 하나에는 온 세상을 가진 것만 같았다. 편선지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핫템이었는데, 종이를 자르고 풀로 붙여서 온갖 특이한 종류의 편지지를 만드는 건 말도 못 하게 재미있었다. 지금은 가위질, 풀칠이 귀찮은데 말이다. 아직도 현관에 뜯지 않은 택배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란 어른.. 왜 이리된 거야..?
여울이네 부모님이 하시던 신식 이용원이 있던 건물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낡은 간판의 여울목이라는 주점이 있었고, 봄이네 어머니가 하시던 기사 식당은 비워진 채였으며, 골목에 있던 밭과 LP가스를 팔던 가스집은 빌라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만든 마디는 행복이었다. 이전보다 다소 쇠락한 모습이 아쉬웠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당시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깨닫는다. 그때도 고민은 있었겠지만 말이다. 즐거움이건 고민이건 지금보다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있다면, 태풍노도의 삼춘기라고도 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있는 것이다.
경험이 사람을 무디게 만들며, 인생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그러니까 학창 시절, 대학생 시절,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만큼 즐겁고 충만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건, 내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고, 나의 이성적인 면이 강해지며 감정이 안정화되고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다. 매너리즘에 절여지는 건 아닌가, 하고 아쉬워할 것은 아니다. 초심이 중요하다며 초심, 초심하지만 초심의 열정을 꼽는 이야기일 테니,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초심보다는 진정성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 생각한다. 처음이라 안절부절못하는 마음까지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 쪽만을 떼어내기는 어렵겠지만, 어린이의 마음에서, 초심에서 작은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을 취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무의식이 된다는 생각이기에 의식적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감탄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