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멘토 레오의 실존육아] 약점의 늪에 빠지고 있는 부모들에게
두 딸에게 학습지를 시킬 요량으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 그 유명한 'OO펜'에 방문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검사를 받았고, 일주일 후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방문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전문적인 상담이기보다 거의 영업에 가까웠다. 담당자는 40대 후반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듯했지만 아이의 약점이라는 늪으로 나를 점점 몰아가더니 결국 먹잇감을 사냥하듯 아이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 난도질하며 공격적으로 약점을 쏟아냈다. "자녀분은 전혀 좋아하는 게 없어요" "자존감이 심각하게 낮아서 무엇을 해도 힘들어하게 됩니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와서 장점이 보이지 않아요" 부정적인 단어가 쏟아졌다. 분석적인 도표를 보여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양하고 포괄적인 영역을 설명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자녀분이 상당히 모지라네요'라며 쇄기를 박았다. '모자라다'는 말에 점하나를 빼서 '모지라다'는 표현은 '이제 인정하시죠?'라는 확신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우리 아이가 '모지리'로 보였나 보다.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박론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한치의 동요도 없이 웃으며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자리를 떴다.
그 후 아내를 통해 담당자가 감정적으로 쏟아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방적인 통보와 충분한 정보제공을 하지 않아 계약을 취소하면서 분쟁이 생겼던 것이다. 아마 담당자는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충격요법을 쓴 것이 었을까? 해지에 따른 앙갚음을 하기 위해 악담을 쏟았던 것일까? 그 저의는 모르겠지만 보통 학습지 회사는 소비자에게 책임을 돌려 갑질 약관을 쓰는데 도가 텄다고 한다. 지난 8월 공정거래 위원회로부터 시정조치를 받았지만 교만한 영업행태는 여전하다.
◇ 척도지 맹신 주의자를 조심하라
현장에서 아이의 기초선을 위해 척도지를 자주 사용한다. 보통 자존감이나 사회성 척도지, 학업동기 검사 등을 통해 현상태를 기록하고, 상담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사후 동일한 척도지 검사를 통해 유의미한 변화를 관찰한다. 사전-사후검사방법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이런 일을 지난 18년간 아동에서부터 성인들에게 다양한 척도를 적용해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척도점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검사를 수행하는 주체자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정확한 검사를 위해 신뢰도와 타당성 있는 검증된 척도를 사용해야 하며 연구논문과 전문가들이 분석해놓은 척도집을 활용해 적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척도는 하나의 방향성이자 경향이지 그것이 사람을 특정 짓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현상을 아이의 존재 자체로 보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다.
OO펜의 검사지는 아마 나름 전문적 척도지일 것이다. 하지만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은 현장의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일 아이는 피곤해서 아침에 코피를 흘릴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토요일이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많아 너무나 산만하고 시장통 같은 분위기였다. 더욱이 초등 저학년과 다섯 살의 집중력에 맞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진행한 것은 연령을 고려하지 않는 처사다. 10세 이하의 아동에 있어서는 기질과 성향을 특정 지을 수 없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담당자가 척도를 맹신하는 태도였으며 사교육 시장에서 이런 것이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몰지각한 사람들은 진단을 잘하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삶의 무한한 가능성에 뿌리를 둔 한 아동을 분류라는 의미로 진단(Diagnosis)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전문가는 아이가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관계 속에 있으며,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힘은 무엇인지를 보는 진단(Formulation)을 한다. 일본 아동정신의학의 선구자였던 마키다 기요시는 아이에 대한 이해와 치료의 틀을 정립하는 진단(formulation)이 중요한 것이지 진단(diagnosis)은 그 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 발달의 바이블은 존재하지 않는다
OO펜의 사무실에 나서는 길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받고 온 엄마에게 호되게 매 맞고, 혼이난 기억이다. 나의 학교 생활이 엉망이라는 담임교사는 힘들어서 못 가르치겠으니 당당하게 촌지를 요구한 것이다. 엄마는 거절했고, 가정에서 바로 잡겠다는 심산으로 매를 드셨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그 품에는 어린 시절 내 모습도 있었고, 학교를 돌아오며 속이 많이 상한 엄마도 있었다. 모든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표창원의 유명한 일화가 떠오른다. 유치원에서 "아드님은 산만해서 단 3분도 자리에 앉아있지를 못해요"라는 선생님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1분도 못 견디던 네가 이제는 3분이나 앉아 있다고 칭찬하셨어"라고 말했고, 초등학생 때는 "아드님이 성적이 몹시 안 좋아요. 검사를 받아보세요"라는 말에 "선생님께서 너를 믿고 계시더구나 넌 결코 머리 나쁜 학생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번에 21등 했던 네 짝도 제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라고 말했다. 그가 우리 사회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될 수 있었던 엄마의 신념은 타인의 진단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동의 발달에 있어서 자못 많은 이론과 척도가 있다. 하지만 결정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없고, 아이들은 본래 이렇게 자란다라고 할 만한 근거와 단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정상발달'이 아니라 '정형발달'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도 그 이유다. 종이조각에 미혹되지 말고, 아이의 전체적인 맥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직 방향성이 있을 뿐 지금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 무조건적인 존중과 믿음
OO펜의 담당자는 어쩌면 한 아이의 발달에 사망선고를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미명 하에 약점이라는 막연한 문제를 객관화하고, 그에 맞는 상품을 파는 것은 하나의 스킬이 되어버렸다. 진정한 교육은 아이의 관점에서 선호하고 좋아하는 경향성을 파악하고,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겁게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대학시절 멘토링 사업을 하면서 전교 꼴등을 전교 1등으로 성장시킨 사례가 있다. 공부를 가르치기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무조건적인 존중과 믿음으로 신념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 한 일이다. 자신만의 강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꾸준하고 일관된 존중과 믿음으로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자 아이를 대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변했다. 장난 삼아 '전교 1등 해볼래?'라는 제안이 아이의 마음에 불을 집혔고, 사범대에 재학 중인 솜씨 좋은 자원봉사자를 섭외해 6개월간 신나게 공부했다. 성적이 점점 오르는 것에 희열을 느낀 아이는 '선생님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라며 가속도를 붙이더니 정말 1등을 하고 말았다. 당시를 회상하면 초기개입에서 진행한 척도지의 점수는 엉망이었다. 자존감은 심각할 정도로 낮았고, 사회적 관계에서 어느 누구로부터 지지받지 못했다. 또래관계는 협소했고, 늘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였다. 척도지의 결과는 참고로만 활용했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아이가 가진 강점을 파악하려 노력한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에 정말 나를 믿어주는 어른이 있었더라면 지금 내 모습은 어땠을까? 참 많은 생각이 다녀간다.
부디 '당신의 자녀가 모자라네요'라는 말은 그냥 흘려보내길 바란다. 교육계 최고의 공염불이라 자부한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나를 응원해주고, 믿어주고, 일으켜줄 존재'가 있다는 신념을 만들어주자. 아이가 성장하면서 뒤집기에 성공하고, 이유식을 먹고, 혼자서 걷고, 화장실도 혼자 가는 정형발달을 해왔다. 그 모든 것이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이 아이를 등진 것임을 꼭 기억하자.
*강점멘토 레오(본명 문선종)은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시절 비영리민간단체(NPO)를 시작으로 사회복지법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이르기까지 지난 18년 동안 아동상담 및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