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고 빠지려다 부딪힌 현실
균형을 흔든 한마디
동갑내기 부부인 우리는 어쩌다 시기를 (많이)놓쳤고 결혼은 다른 사람들의 일로만 여겼었다. 각자의 집에 살며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 평온한 일상의 하나였고 성향도 비슷해 적당한 무과심과 세심함이 어우러진 균형있는 상태였다.
그 균형을 깨뜨린 건 남자친구의 한마디였다. “너 입원할 때 보니까 보호자는 무조건 가족만 된다더라” 아닌가, 그 균형을 깬 건 갑자기 코로나 시기에 입원했던 나인가.
아무튼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두시간 정도 정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지금 보니 노년에 병원 보호자 되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 법적으로 그 권리를 갖자 뭐 그런 대화였나 싶군.
우리는 그렇게 “그래 결혼하자” 라는 말도 없이 “결혼식을 해야할까?”, “안하고 서류만 할까?”, “그랬을 때 양가에서 쏟아질 최악의 경우는 뭐가 있지?” 라는 대화의 꼬리를 물어가며 이미 결혼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엄마는 잘난 것도 하나없는 딸에 대한 허황 된 기대가 높다 못해 하늘을 찔렀다. 사실 내가 결혼을 포기하고 살았던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누구를 데려가도 싫어할 것 같았다. 남의 아들 괴롭히느니 혼자 산다라는 마음이 컸는데 남편은 “자신 있는데?”라고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빠르게 치고 빠지기 전략
우리는 전략을 세우기로 했다. 양가 부모님이 우리의 결혼에 개입하지 않도록 ‘빠르게 치고 빠지기’ 였다.
우선 결혼을 통보하기로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이벤트가 필요했다. “우리 혼인신고 했어”로는 그 이후의 삶이 차디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식을 한다라는 기준이 생겼다.
결혼식은 아무래도 브랜드디렉터인 네가 알아서 잘 하지 않겠느냐며 남편은 그 어떤 의견도 없이 따르겠다고 했다. 평소 나의 사회생활용 성격은 확신의 E(외향형)이지만, 나의 본성은 매우 I(내향형)로 결혼식에 지인들의 시선을 받는 걸 상상하니 땀이 쭈룩 흘렀다.
그러고 보니 20대 이후로는 결혼식에 대한 상상조차 한적이 없어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 나이에 드레스를 입고, 청첩장을 돌리고, 예식장에 입장을 한다고? 아니 못해. 무리무리.
50명 예식, 현실의 벽
소규모 예식으로 하고 청첩장은 만들지 말고 양가 합해서 50명만 부르자. 생각보다 50명 정도가 편하게 식사하고 갈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공간과 식사가 마음에 들면 교통이 쉽지 않았고, 교통이 편리하면 공간이나 식사가 문제였다.
어렵사리 4곳으로 압축했지만, 최소 인원수가 문제였다. 최소 100명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100명 앞에서 인사를 하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두 번째는 비용이었다. 말이 소규모웨딩이지 더 비쌌다. 사람이 많을수록 “단가”는 내려가기 마련.
우리는 서울에서 예식을 준비했었는데, 북한산 풍경을 볼 수 있는 레스토랑 통대관, 강남에 위치한 호텔 소규모웨딩룸, 한옥 예식 통대관 등이었다.
억지로 사람 수를 늘리고. 사실 빼는 게 더 어려웠다. 양가 50명이라봤자 각각 25명씩. 그냥 친척까지 가기도 애매한 숫자 아닌가. 하지만, 어렵사리 줄인 사람을 늘리려니. 친한 친구보다도 몇 번 못 본 친척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불러야하나. 가족식으로 했다라고 양해를 구하고 친구나 직장동료들은 뺄 생각이었는데 100명은 왠지 ... 가족식 느낌도 아니었다.
어쨋거나 견적서 의뢰를 하자, 생화와 스드메, 사회는 누가 볼건지, 답례는 어떤 것으로 할건지, 식사는 어떤 ‘급’으로 할건지에 대한 1~4순위까지의 예상 견적서가 날아왔다.
곰곰이 비용들을 계산하다 “이 돈이면 내가 우리 식구들 다 데리고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하자 남편은 “음, 그렇지. 그 정도 비용이 나오네. 게다가 축의금을 받을 것도 아니니 그냥 우리 하고 싶은대로 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한국에서의 견적과는 또 다른 험난한 해외 결혼식의 서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