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바꿀게

이제는 어른들이 편견을 버리고 행동해야 할 때

"엄마~ 그거 재미없어서 안 갖고 노는 거야!"


해가 바뀌고 여섯 살이 된 아들과 놀이방에서 놀다가 저 구석에 숨겨진 장난감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도 같이 가지고 놀자 했더니 아들 녀석은 이제 시시해서 가지고 놀지 않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럼 자리만 차지하니 버리자고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엄마, 그래도 버리는 건 안돼!"라고 말하던 아들내미. 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인이 양엄마라는 그 여자도 이런 마음이었던 거야?'




지난해 연말부터 최근까지 <정인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양부모에게 입양된 정인이는 입양 후 한 달 후부터 아동학대에 노출되었고, 결코 죽일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파렴치한 양엄마의 무자비함 속에 생후 16개월 된 정인이가 제대로 피지도 못한 작은 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숨겨진 뒷 이야기들을 쏟아내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수많은 사람들이 법원에 진정서를 내고 있다고 하니 천인이 공노 할 일임은 확실하다.


정인이 양엄마라는 사람은 본인에게서 태어난 첫째 딸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정인이를 입양했다고 한다.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어 입양을 한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어디 있나 싶다. 그 부부에게 불임과 같은 이슈가 있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입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어떻게 동네 마트에 가서 장난감 하나 새로 구입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지 너무나 어이가 없을 뿐이다.


아이는 반짝이는 새 장난감을 보면 신나고 즐겁다. 한동안은 새 장난감과 사랑에 푹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금세 식어 버린다. 빛나던 장난감은 어느새 방구석 어딘가에 쳐 박혀 있고, 아이는 그 장난감의 존재도 쉽게 잊어버린다. 나도 아들이 태어나고 한창 장난감에 대한 애정이 폭발하던 시기에, 새로운 장난감에 대한 흥미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고는 동네에 있는 희망장난감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여하기 시작했다. 흥미가 사라질 즈음 새로운 장난감으로 교체를 해 주면 아이의 즐거움은 계속 유지되었다.


정인이 양엄마에게 정인이는 이런 존재였을까? 떠도는 소문들처럼 그녀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을 고려했을 때 입양이라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 결혼 전부터 부부가 함께 입양에 대한 꿈을 꿔오던 것을 수행하기 위함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법의 심판대에서 가려지겠지만, 그녀에게 정인이는 장난감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장난감은 생명이 없어 관심을 끄고 저 구석에 처박아 놓으면 끝이지만 아이는 지속적인 사랑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엄마라는 사람에게(이런 사람에게 '엄마'라는 단어조차 붙여주기 싫지만) 끝없이 갈구했을 텐데, 정인이는 살아있는 생명이니 결국 사랑이 식자 학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배울만큼 배우고
알만큼 알 사람들이 왜 이런 거지?"


작년 10월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밥을 먹던 동료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게 동료는 <정인이 사건> 기사를 읽어주며 너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동료와 <정인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앞서서 발생했던 또 다른 아동학대(계모가 아이를 훈육한다고 캐리어 속에 아이를 가두고 결국 아이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 젖은 도시락을 먹어야 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동학대에 대한 편견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아동학대는 부모가 못 배워서 무식한 집, 가난한 집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잘 사는 집에서, 아니면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평범한 집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견 말이다. <정인이 사건>의 핵심은 아동학대 신고가 3번이나 있었고 정인이를 살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경찰이 가진 편견 속에 묻혔다는 것이다. '양부모가 직장도 있고 번역일도 한다는데 이렇게 괜찮고 번듯한 집에서 설마 아동학대가 일어났을까?'라는 편견이 결국 정인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이 든다.


아동학대의 신고 주체가 의료인이라면 신고 이후에 정인이가 즉시 분리될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하는데 경찰은 부모 말만 믿었다. 우리 머릿속을 지배한 이상한 편견은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동학대로 신고했던 의료진이 어느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아동학대가 99% 아닌 것 같다고 할지라도 단 1%의 아동학대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 기사 내용이다. 언제나 우리는 1%의 희박한 가능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배웠는데, 왜 이것이 현실에서는 괴리가 있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정인이를 안는데,
정인이가 나를 너무 꼭 안는데,
그게 살려달라고 그런 거 아니었나...
그걸 몰랐던 건 아닌가...."


정인이가 입양되기 전 위탁가정에서 정인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키우셨던 어머님의 인터뷰 중에 저런 말이 있었다. 정인이 양엄마가 지난해 6월 한 카페에서 위탁가정과 정인이를 만나게 해 주면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정인이를 만났다고 한다. 이마에 붉은 멍이 있고 피부가 좀 검게 변해 있었지만 밝은 웃음은 여전했던 정인이를 보면서 정인이가 왜 이렇게 많이 까매졌냐고 물었는데 밖에 많이 돌아다녀서 그렇다는 답변에 그냥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만남이 성사되었던 날이 두 번째 아동학대 의심신고로 양부모가 경찰 조사를 받은 바로 다음날이었단다. 정인이와 헤어지기 전 위탁가정이 정인이를 한 번 안아봐도 되냐고 해서 양부모가 그러라고 허락을 하고, 위탁가정은 품에 정인이를 안았다. 그때 정인이가 본인을 너무 꼭 안는데 그것이 살려달라는 그런 신호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드셨다는 데 이 기사를 보면서 또 한번 억장이 무너져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만남 이후 석 달 뒤, 정인이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정말이지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에게는 우주 전부와도 같은데 양엄마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소중한 아이를 그렇게 막대했는지 너무나 묻고 싶다. 어떤 마음으로 정인이를 입양했길래,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구급차가 아닌 택시를 탈 수 있었는지, 정인이가 응급실에서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어묵 공구에 구매 댓글을 달 정신이 있는건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 또한 결혼하고 3년 만에 아들이 찾아왔던 터라 한 가정에 새 생명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할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고, 평생 감사함이 끊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 이후 남은 생을 아이와 함께 평생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감사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아들의 얼굴을 지긋이 보고 있을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나에게 찾아와 준 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워서,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 수많은 다짐을 하며 나 스스로를 더 다독인다. 내 옆에 찰싹 붙어 내 수면의 질을 방해할지라도 현재 내게 이보다 큰 기쁨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본인들에게 저절로 찾아온 아이도 아니고 자신들이 선택한 아이라면 이보다 더한 사랑을 줘도 부족할 텐데, 그 작은 생명에게 왜 그런 무자비한 일들을 행했는지 너무나 화가 나서 정인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깰 지경이다. ‘엄마'라는 자격에 이렇게 먹칠할 거라면 그 자격 당장 가서 박탈시키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세상에는 왜 이리 엄마답지 않은 엄마들이 많은 걸까.


엄마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엄마 자격증'이라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은행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고 그 자격증을 유지하기 위해 몇 년에 한 번씩 '보수교육'이라는 것도 받는다. 은행원으로 산다는 것은 대학 4년 내내 봤던 시험보다 은행에 취직해서 봤던 시험의 개수가 훨씬 더 많을 만큼 시험과 공부의 연속이다. '엄마'라는 자격에도 나는 끊임없는 '보수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엄마라는 위치와 그것이 가진 위대한 힘에 대해 끊임없이 인지하도록, 한 생명을 꽃 틔우는 엄청난 사명감을 잊지 않도록, '엄마 자격증'을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권장하는 사회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영화 같은 생각이 드는 밤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외침이 "엄마~~~~" 아닌가.


그만큼 "엄마"라는 존재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세상 전부인데 가녀린 정인이에게는 그런 제대로 된 엄마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하다. 이제는 제대로 된 '아동학대'에 대한 지침과 법이 온전하게 만들어져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정인이 법'이라고 만들어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뼈 아픈 후회가 다시는 제발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바꿀게! 하늘에서 우리 어른들 잘할 수 있게 응원하고 지켜봐 줘! 작은 천사야, 사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의 모든 천윈루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