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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 Nov 03. 2021

일상을 여행으로 만드는 사람

따뜻한 봄에는 서대문형무소

┃진주와의 약속


진주는 종종 예상하지 못한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하곤 했다. “언니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서대문형무소에 가요” 그녀가 말한 약속 장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서대문형무소다. “따뜻한 봄이 오면 서대문형무소에서 보자고?” 나는 뜻밖의 행선지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장소 앞에 붙은 ‘따뜻한 봄이 오면’이라는 이질적인 인조건이 궁금해 되물었다. “네, 따뜻해지면 가요” 진주는 별다른 이유는 없어 보이는 모양으로 명랑하게 대꾸했다.


그날부터 나는 뜻밖의 이유가 붙은 서대문형무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서대문형무소를 언제 가봤더라? 미리 역사공부를 조금 하고 가야 하나?' 등의 생각이 종종 피고 지길 한 달, 벚꽃잎이 막 떨어지기 시작한 4월의 끝무렵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어른이 되고 처음 방문해 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따뜻한 봄임에도 곳곳에 찬 기운이 어렸다. 우리는 기획전 벽면을 가득 이어 붙인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한참 서서 바라봤다.


그날 하루의 기억은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그때부터 진주는 나에게 일상생활에서 약간 벗어난 장소로 이끄는 존재가 됐다. 그녀와 함께하는 뜻밖의 장소가 일상을 여행으로 만든 것이다.


2021. 10. 30 덕수궁 돌담길의 하늘


┃함께하면 여행이 되는 사람


"언니 핼러윈이니까 덕수궁 밤 산책 가요" 피부에 닿는 바람이 예년보다 찬 10월 초, 어김없이 진주는 나에게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이유로 만나자고 말했다. 핼러윈과 덕수궁의 조합이야말로 그녀 다웠다. "핼러윈에 이태원도 아니고 덕수궁에 가자고?"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흔쾌히 그곳에서 만나자고 말했고 따뜻한 봄날의 서대문형무소 처럼 이내 그 약속을 기다렸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10월의 마지막 주말, 우리는 시청역 앞에서 만났다. 시청과 광화문 일대는 서로의 대학시절 통학을 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나눌 추억이 많았다.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20살의 진주가 우리 학교에 놀러 와 학교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은 일, 삼청동에 좋아했던 커피집이 모두 사라진 이야기, 종로에서 보낸 20대의 시간들에 대해 함께 추억했다. 그렇게 시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덕수궁 야간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권을 끊었다. 토요일의 덕수궁은 연인과 가족으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붐볐다.


어둡고 북적이는 궁궐 안은 채도 낮은 빛으로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분위기에 맞는 BGM이 필요하다며 드라마 해를 품을 달의 OST인 '시간을 거슬러'를 틀고는 같이 이어폰을 나눠끼고 흥얼거리며 덕수궁을 천천히 거닐었다. 궁 내부 직원들의 복장이 모두 전통복인 바람에 이곳이 진정한 K-핼러윈의 성지라는 농담과 함께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로 나와 이어진 정동길을 걸으며 몇 해 전 함께 간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기억을 두런두런 나눴다. 진주는 나에게 그날의 풍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느낀 감정들, 당시 나의 머리 색깔, 같이 먹은 음식 등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즐겁다는 듯 늘어놓았다. 내가 미처 잊고 있던 순간들이 그녀의 말과 함께 반짝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함께한 추억이 상대에게 알록달록하고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10월의 마지막 주말 진주와의 만남은 한 달 내내 일상에 지친 나에게 위로와 힘을 준 여행이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만나 추억을 쌓고 함께 나누며 즐거워할 것이다.


오는 연말에도 그녀와의 여행 같은 만남을 기대하며 겨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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