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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Sep 13. 2023

목적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애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훅하고 끼쳤다. 조금만 걸어도 바다가 코앞이었지만 습함보다는 건조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이 팔등을 스쳤다. 오멍, 가멍. 공항을 나서며 스쳐 지나가듯 눈에 담겼던 팻말의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야자나무가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던 제주는 마치 이국적인 풍경을 연상시켰다. 하늘은 또 얼마나 푸르고 높던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무척이나 촌스럽게 보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층층이 쌓이고 흩어지는 구름만 해도 입을 헤 벌리고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정신 차려. 우리 버스 타야 해.”


  조금 전부터 휴대폰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헤드폰을 낀 채로 다음 일정을 알아보던 동생은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여행의 총 책임자(?)이자 가이드를 맡은 이는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행 출발 전, 동생은 여행 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어플을 내게 보내주었고 자신만의 여행코스를 짜 놓긴 했으나 여행을 떠나기 전 버스번호와 버스의 출발시각, 숙소나 기타 활동의 모든 것을 스터디한 후 여행을 즐기는 나의 성향(극강의 ENTJ다)과 달리 대략적인 계획만 세워놓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극악의 INTP다) 동생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첫 일정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보는 듯했다.



  그러니까 동생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맡기고, 여행 첫날 내내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숙소까지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그 버스는 언제 오는지, 배차 간격은 어떻게 되는지, 자전거는 어디서 어떻게 빌릴 건지, 어느 코스를 돌아볼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전무했다는 것이다.(동생과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여행 내내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어왔다 나오곤 했다)


  그때까지 그러한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나는 (그래도 동생이 그 정도의 무계획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머리에 얹어두었던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입고 있던 니트의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평소 낮 시간에는 주로 실내에만 머무는 데다, 외출 자체를 즐기는 유형의 인간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햇빛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동생의 낯빛은 점점 굳어갔다. 어... 어... 동생은 공항의 왼쪽과 오른쪽 방향을 오가며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을 자꾸만 바꿨다. 그 사이 여러 대의 버스가 우리의 앞을 훅하고 지나갔고 나는 점점 장녀 특유의 촉(?)으로 수상함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왜? 뭐가 잘 안돼?”

  “어. 버스가.. 잠시만.”


  평소 같았다면 ‘이 새끼야, 여행에선 시간이 금인데 지금 뭐 하는 거야.’로 시작한 잔소리를 퍼부었겠지만 나는 그날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동생의 옆에서 두 귀에 에어팟을 꽂은 채 그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동생이 당황과 방황을 오가는 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평소 여행 전에 대략적인 정보를 찾아보는 편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나에게도 조금 달랐다. 워낙 많은 일이 한번에 겹쳐 있던 시기에 급작스럽게 떠난 여행이기도 했고, 여행 일정에 대해 세세하게 알아보기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에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아, 모르겠어.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한참을 지도 앱을 켜둔 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동생은 갑작스럽게 홀로 달려가더니 (지혼자) 버스에 올라타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뭐? 이거 타는 거야? 갑자기? 나는 공항 벽면에 기대어 선 채 멍을 때리다 정신을 차리고는 부랴부랴 버스에 올랐다. 버스 기사는 동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미소지었다. 예전부터 그런 반응은 익숙했던 것 같다. 우리 남매는 외형적으론 닮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들은,, 누가 봐도 남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숙소에 짐을 맡긴 뒤 또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었다. 한낮의 빛이 너무도 강렬해 미리 발라둔 선크림이 지워지다 못해 목을 타고 줄줄 흐르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동생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 듯 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심해야 한다며 내가 박박 몇 겹으로 선크림을 발라두었다) 그렇게 손등으로 열심히 땀을 훔치며 걷다 약과 가게를 발견해 귤 약과와 땅콩 약과를 사 먹고 민가인 것 같은 조용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지나 도착한 자전거 대여점. 내가 생각한 자전거 대여점은 평범하고 작은 일반 자전거였는데, 이놈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알아 왔는지 그곳에 있던 자전거들은 하나같이 산.악.용 같았다. 알고 보니 스쿠터와 전기자전거, 그리고 진짜 산악용 자전거 위주였다.


  “누나가 탈 수 있을랑가? 자전거 몇 년 만에 타요?”

  “음.. 코로나 이후로는 사실 처음 타요.”

  “기어 어떻게 만지는지 알아요?”

  “기어... 가 뭔가요?”

  “어이, 동생! 누나랑 자전거 타기로 협의한 거 맞아?”



  친절한 자전거 아저씨의 도움으로 나는 내 몸집보다 큰 자전거를 질질 끌며 아파트 단지를 오가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휘청휘청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무거워 자전거에 정복된 수준이었지만 한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던 무법자의 정신이 되살아나는지 점점 페달을 밟는 데 속도가 붙었다. 동생은 이미 자전거가 참 좋다며 얼굴에 싱글벙글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헬멧을 머리에 꾹 눌러 쓴 채 바닷가로 향했다. 그때에도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동생을 따라 도착한 곳에 바닷길을 따라 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엇도 배울 수 없고 같은 풍경만 정처 없이 이어지는 것이 전부였지만 어딘지 마음이 씩씩하게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바위에 몸을 맞댈 때마다 부서지는 파도와 맑고 투명한 물빛에 반사되는 빛, 유영하듯 흔들리는 선체와 그 위를 항해하는 새, 그리고 그 손을 맞잡은 채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렇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닥쳐올 시련을 알지 못하고 그저 붕 뜬 마음으로 여행의 환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이라면 도로 위의 표지판과 간판명, 지하철역명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었던 나의 위치를, 그곳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아갈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풍광들을 감상하는 것이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날 마음이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자전거 안장에서 그만 내려와도 좋겠다고 생각할 때 자전거를 놓아두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기.


  살면서 그런 선택을 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페달을 밟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했다. 여기서 더 가도 되나? 조금 쉬지 않아도 되나?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 채로 이렇게 멀리 떠나와도 되나? 나는 돌아올 길을 알기 위해 어리석게 빵 조각을 땅에 떨어뜨리며 걸어가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부질없는 속앓이를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 얼굴 표정에서 걱정이 내비쳤는지 한참을 앞서가던 동생이 문득 자전거를 세우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내게 손짓했다. 동생의 뒤편으로는 두 개의 갈림길이 있었다.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길과 섬의 가운데로 향하는 것 같은 마을길. 동생은 내게 선택하라고 했다.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나가 선택한 길로 가보자고.



  “야.... 나 진짜 이번에 아무것도 몰라.”

  “뭘 아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 아니야. 그냥 누나 원하는 대로 하라고.”

  “너 진짜 무식하게 여행하는구나.”

  “이 정도 사소한 선택 정도는 편하게 끌리는 대로 해도 되잖아.”


  나는 그제야 내 앞에 펼쳐진 두 개의 길을 천천히 보았다. 마을 길은 돌담이 죽 이어져 있는 데다 소담한 동네의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고, 해안길은 말 그대로 제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원하는 건…… 나는 한참 동안 두 갈래의 길 앞에 서서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서른쯤 한 번 정도면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사랑은 정말로 서른쯤에 찾아왔다. 나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말이 무섭게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두 갈래의 길처럼 동시에 나타났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나를 만나기 위해 늦은 저녁에도 달려왔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리의 길이를 가늠하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한번 해보자고. 예의 바른 첫째로 태어난 나는 무모하고 무례하게 그에게 연락했고, 그 방법 또한 촌스럽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형(?)에 가까웠던 첫인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저 그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고, 그 사람의 세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꽤 비슷한 점이 많은 듯 보였지만 나는 그 사람이 사는 세계가 어쩐지 나와는 다른 세계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속내를 드러내기보단 주로 타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고 경청하는 편(어딘지 모르게 조용히 돌아 있는 ISFP였다)이었다면 나는 효율적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 노력하고, (주로 I와 친해서) 대화를 주도하거나 이끄는 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좋게 말해 리더형 타입이었지만 날것의 시선으로는 지독한 자기통제광. 어쩌면 타인에게도 은근한 통제를 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태껏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 저곳. 다음으로 가는 길엔 늘 상상 가능한 다음이 있어야만 했다. 규칙적으로 생활했고, 익숙한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런 내가 정말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사건으로(?) 내 마음 가는 대로 그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라고 했지만 당시 나는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쩐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직감이 있었고 그래서 그와 나의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목적지와 다른 곳에 도달했을 때,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속상해질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몹쓸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목적지를 잃어버린다는 건 흔치 않은 감각. 그렇지만 우리가 도달한 모든 곳이 결국은 길이 되는데 나는 나의 실패가 마치 회생 불가능한 종점인 것 마냥 굴었던 것 같다.      






  찰나에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다 나는 해안길을 선택했다. 더 이상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동생은 지도를 살펴보더니 이쪽으로 가면 애월로 가는 거라고 했다. 애월. 나는 방송에서 많이 들어본 듯한 지명을 속으로 되뇌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의 배가 꼬르륵거릴 때까지 말없이 페달을 밟았고, 가는 길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여러 번 막힌 길을 향해 달리며 헤매기도 했고,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엔 기어코 우당탕탕 넘어져 온 다리가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결국 자전거에서 내린 채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검은 파도의 소리만 들려오는 바닷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동생이 느린 템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건 내 동년배나 선배나 알 법한 곡이어서(이 놈이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 취향이 이상해졌다) 나 역시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좋았어. 마음 가는 대로 해본 거.

   그리고 이제 시작인 거야.’


    우리는 그렇게 장장 8시간의 라이딩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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