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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Nov 22. 2024

가려진 운을 지났더니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03 기내에서 (D-DAY)

해외여행을 하며 가장 즐거울 때는 비행기를 탈 때다. 나는 내가 비행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고, 정확히는 구름 위에 올라타 있는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륙과 착륙 사이. 두터운 구름을 헤쳐나가면 언제나 새로운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달간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떠나온 공항에서 나는 아침 일찍 라운지를 찾았다. 사전에 등록해 둔 카드로 라운지를 이용하며, 그곳에서 여행기의 프롤로그를 작성했다. 한 카드사의 ux라이터로 근무하며 내가 직접 작업한 카드의 프로세스대로 내가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제일 신기했고, 방문했던 스카이허브라운지는 꽤 재밌고 맛있는 경험이었다.



  공항에 머무는 동안에는 우연히 선물 받게 된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과 전하영 작가의 <시차와 시대착오>를 읽었다. 예전이었다면 쇼펜하우어가 매우 냉소적이고 별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막상 공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읽었던 구절은 꽤 공감이 갔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서글펐던 것 같다. 반면 전하영 작가의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기분 좋게 한국문학을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밤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낸 시간. 어느덧 진짜로 탑승구가 열리게 되었고, 조금 긴장이 됐다. 정말로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떠나는 여행. 낯선 문화권으로의 여행. 온통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일은 마치 가려진 구름 사이를 배회하는 비행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4시간 동안 나는 잠을 자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시차와 시대착오>를 다 읽고 난 뒤엔,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를, 그 다음엔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반 정도 읽고는 그 자리에서 책을 버렸다. 영화는 <첫눈에 반할 통계적 확률>.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오니 온통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운명이라니. 나는 그 이야기가 지긋지긋하다. 정말로.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운명을 믿는다고 하기에 내게는 언제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명보다는 기회. 지금껏 나는 기회를 잡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학부 때에도, 회사에서도. 원하는 게 있으면 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냉정하게 요구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알아갈수록,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이 넓어질수록 나의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흐름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열기 시작한 이 세계는 언제나 변수가 따랐다. 변수가 없었던 적이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하면 너머에 더 큰 산이 존재했다. 이쯤 되면 좋은 어른, 좋은 선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언제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미성숙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14시간을 비행해 도착한 파리. 줄곧 강렬한 햇빛 때문에 비행기의 창문을 닫아두다 랜딩을 위해 열어둔 창문 밖으로는 두터운 구름이 잔뜩 깔려 있었다. 비행기는 이제 조금씩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구름을 통과하고, 통과하고, 통과하며. 한참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헤매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함에 입을 비죽였는데, 나는 차츰 눈앞에 닥친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구름을 지나면, 나는 정말로 새로운 땅에 발을 딛게 되겠지. 몇 분간을 헤매이던 구름 속을 거니는 동안 나는 올해 내게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많은 새로운 일들을 겪으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처음 마주하는 일들, 불확실한 세계를 달리는 동안 생채기가 나기도 했고, 한 뼘 더 성장할 수도 있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본다면..



  처음엔 내게 닥친 많은 일들 중에 불행한 일들만 눈에 보였다. 뜻하지 않게 겪게 된 불운들. 내가 무엇인가를 손에 넣음으로써 잃어야 했던 것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있어 나는 지금 이곳 프랑스에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올해는 이렇게 될 것이 운명인지도. 그래서 감사했다. 나의 불운이 나를 프랑스로 이끌어주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서. 찰나에 웃음이 나 신기한 듯 창밖을 바라보는 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나를 툭툭 치며 묻는다. 그녀는 아무래도 프랑스인 같았다.


  "파리에 처음 와?"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꼽을 떼야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나, 유럽에 처음 와!"

  

  그러자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웃어 보였다.


"축하해. 한국만큼 즐거울 거야. 재밌는 도시거든. 파리는."


  옆자리에 앉은 승객의 환영은 마치 프랑스로부터의 첫인사 같았다. 출국심사를 하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파리의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안전을 위해 우버 앱을 부르고 기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래서일까. 기사로부터 "알 유 오케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하하.



  기사 역시 프랑스에 처음 온다는 내 말에 "굿"하며 엄지를 척 세워 보였다. 우버에서 멀미만 심하게 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태어난 지 이제 5개월 밖에 되지 않은 초보 아빠 "닉"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음에 꺼낼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고, 갓 구워진 바게트를 입에 와앙 물며 들린 에펠탑의 야경.


  파리의 첫날은 온통 내게 사랑스러웠다.



ㅁ인천공항

- 슬리퍼 5,000원

- 스트랩 13,000원

- 생수 (기억안남)


ㅁ 기내

- 하리보 젤리 2봉 6달러(각 3달러)

- 칸쵸 3달러

- 칫솔세트 10달러


ㅁ파리 1일차

- 우버 58유로

- 바게트 1.99유로

- 치즈 5유로?

- 초콜릿 3유로


ㅁ 고정지출

- 숙박 106,802원

- 티웨이항공 1134,660 (변경을 여러번 해서.. 올라감..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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