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런던(D+7)
"여기 뭐예요? 저 진짜 이렇게 개운한 잠이 처음이에요."
저녁을 먹다 말고 매니저를 만나자마자 내가 건넸던 첫마디였다. 정말이었다. 서울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토록 개운한 잠이라니. 런던에 온 이후로는 줄곧 여덟 시가 조금 넘으면 꾸벅이며 졸기 시작하다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네시에서 다섯 시 사이 일어나는 걸 보니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 정도. 그 잠깐의 수면은 뇌를 씻어낸 정도로 개운했다. 너무 편안하게 잠을 잤기 때문에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실제로 런던에 거주할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었다. 아직 다음 회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 한인민박의 스탭으로 근무하며 이곳에서 글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한 새벽, 홀로 소등되어 있는 계단참을 밟고 올라가 부엌의 불을 켜고 전날 미뤄뒀던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모두가 잠든 시각, 아침형 인간이라 홀로 깨어 있다. 처음엔 파리에서의 시차적응이 아직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퇴사 이후 올빼미로 지내곤 했으나 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떠나 온종일 걷다 집에 돌아와 업무를 마치고 나니 다시 본래의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곽민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여행자로서 나는 제법 성실했던 모양이다.
"맞아요. 푹 주무시는 것 같더라고요."
머무는 동안 매니저와 룸메이트 1명과 함께 세 명이서 방을 썼다. 평소 낯을 가리는 데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잠귀가 밝고 예민한 편이기도 해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는데, 이곳 런던은 무슨 일인지 밤 동안 누가 나를 업어 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마지막 밤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런던에 머무는 동안 나는 홀로 무어라 웅얼웅얼거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도 갈았다고 하니, 얼마나 사납게 잠을 잤는지 안 봐도 뻔하다. 한편 그렇게 잠을 자본 경험이 정말로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이부자리에 누운 시간과는 반비례하게, 서울에서부터 나는 언제나 쪽잠을 잤다. 머리만 대면 금세 잠이 들었지만 또 금방 깨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일부러 알람도 맞추지 않고 이부자리에서 밍기적거리며 일어난 아침, 시리얼 가득 우유를 부어 먹고 도착한 곳은 대영박물관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다음날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내가 신청한 투어에는 대영박물관 가이드가 없었던 것이다. 런던의 둘째날 아침. 목표했던 건 투어로 가보지 못할 법한 곳들을 가보는 거였다.
사실 런던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몇 년 전 제주를 여행할 때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는 여행을 하다 보면 나와 맞는 도시가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을 잘 자는 곳이 있더라고, 그곳이 내가 터를 잡을 곳이라는 이야길 해주었었지. 그 말이 순간 떠오를 정도로 런던에 머무는 동안 정말 좋은 잠을 잤다. 그래서 런던의 랜드마크를 여행하는 일이 내게는 지루하게 느껴졌고, 날마다 그날 밤의 잠드는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잠이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의 잠이다.
한편, 늘그막이 일어나 간 곳은 영국박물관. 여러 박물관을 가보았지만 가장 재밌었던 곳이 대만의 박물관이었다면 런던의 박물관은 건축물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실 가장 재밌었던 곳은 이집트관이었고, 새삼 영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박물관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어 한참 동안 하관이 비대하게 나오는 사진을 찍고 있는데, 멀리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 한국어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에서 한국인 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사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국인 가족을 찍어주고 나도 대영박물관을 배경으로 호기롭게 사진을 찍었다. 다음 목표는 피쉬앤칩스 먹기. 런던의 로망이 있다면 실은단 하나, 피쉬앤칩스를 먹는 거였다. 특유의 억양으로 우아하게 나이프를 드는 영국인을 떠올리면 괜히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게다가 셜록홈즈가 먹던 피쉬앤칩스라면! 대영박물관에서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적당히 깨끗해 보이는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유명하지 않아도 적당히 깨끗해 보이면 선택하는 편이다.
피쉬앤칩스는 말 그대로 동태전이나 다름없었다. 간이 되어 있지 않은 두꺼운 동태전과 감자튀김을 먹는 느낌. 15파운드, 한화로 약 2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먹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아까 그 한국인 가족 무리가 앉아 있다. 내가 눈짓하니 저기서도 방긋 인사를 한다.
"여기 맛집인가 봐요."
냉큼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내게 묻길래 나는 그저 배가 고픈데, 깨끗해 보여서 들어온 거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조금 전 투어했던 가이드가 이 식당을 추천해줬다는 게 아닌가. 알고 봤더니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식당 내부에는 한국인 직원들이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응대하고 있었고, 식당 내부는 놀랍게도 한국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대구살로 먹을게요. 영국에서 한국어로 주문이라니. 찰나 현지 음식을 먹겠다며 가게를 나갈까 하다 수산물인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더 편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신없이 운영되던 식당 내부. 파리에서 (오븐이 고장 난 게 문제라고 했다) 주문을 한 번 거절당한 이후로 주문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쪽을 선택한 것 같기도. 그렇게 맛보게 된 내 생에 첫 피쉬앤칩스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엄마가 만든 부침개 같았다. 니맛도 내맛도 아닌 맛. 왜 사람들이 영국 음식에 대해 한 소리를 얹곤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점심을 보내고, 빅벤을 보고, 웨스터민스터사원과 국회의사당을 차례로 본 뒤 템즈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철지난 발라드를 들으며 런던아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찰칵. 멋대로 길을 걷다 관심이 생기는 가게를 발견하면 길을 새기도 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하루 같았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건 다음날의 투어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해리포터 스튜디오 예약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상심해 있던 참이었다.
해가 질 무렵 서둘러 집에 돌아오며 근처 편의점에서 애플망고 하나를 사 왔다. 이곳은 외식 비용은 물가가 사악하지만 비교적 재료값은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자주 음식을 해 먹곤 했는데, 여행 일주일차가 되니 슬슬 과일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잘 익은 애플망고를 사 와 주방에서 낑낑거리며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웬걸, 애플망고는 물론이요, 집에서 망고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벗겨 먹는 것인지 모르는 거다. 인터넷을 보면 반으로 갈라 칼집을 내라고 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잘 쪼개지지 않았다. 심지로 갈수록 딱딱한 것이 이거 뭐 감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덜 익은 망고를 사 온 게 아닐까 싶다. 겉부분만 대충 사과를 깎듯 베어 먹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종일 무언가를 본다고 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숙소에선 처음에 입구에 들어오는 방법을 몰라 몇 번이고 낑낑거렸고, 런던 거리를 거닐며 어리바리하게 다니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오늘 진짜 별로야..."
숙소에선 석식으로 라면이 무료로 제공되었는데, 그날밤 나는 라면에 물을 올리며 가만히 분을 삭였던 것 같다. 그런 날이 있다.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것 같은 때. 가장 기대하고, 가장 열심히 준비해도 아무것도 안 되는 때. 그런 때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금세 기가 죽어버린다. 런던에서 보낸 3일차 밤은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반면 재밌는 일도 있었지. 그렇게 늦은 저녁 라면을 먹고 정리하는데, 만난 룸메이트와 매니저와 떨었던 수다는 최근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중 꽤 재미가 쏠쏠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나라도 구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이야기는 언젠가 나눌 날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애플망고를 까먹을 밤이야? 싶었지만, 어쨌든 입 안에 달콤함은 남아 있지 않은가. 남은 런던에서의 3일. 나는 다음날과 또 다음날을 생각하며 또다시 꿈나라로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