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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Nov 29. 2024

저물기 위해 뜨는 도시, 런던

#08 런던(D+6)

해리포터가 처음 호그와트(마법사 학교)로 가는 시작점은 킹스크로스 역이다. 9와 4분의 3역에서 해리는 친구인 론과 헤르미온느도 만나고, 덤블도어도 만나고, 해그리드도 만난다. 물론, 친구라고 하기엔 동급생 수준인 말포이나 악당 중에 최고 악당인 볼드모트도 만난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해리포터가 서 있던 그곳,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다.


런던에 대한 첫인상은 '신사의 도시'였으나, 내가 마주한 런던의 첫인상은 '별로다'였다. 국경선을 넘자마자 파리에서도 받지 못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외교부의 알림이 있었으며, 현재 조류독감이 극심해 육류나 가공류를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메시지들이었기에(파리에서는 마약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안내문만 있었다) 이전에 런던 여행자들로부터 수집했던 정보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파리올림픽으로 파리에 대한 이미지를 깎고 있었던 주범들이 런던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숙소 앞의 우버를 기다리는데 웬 남자가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도 우버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생에 처음으로 유로스타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진이 잔뜩 빠져 있던 나는 메고 있던 배낭과 한쪽 팔에 들고 있던 가방이 무거워 지친 얼굴로 우버를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 역에서 쉽게 잡힐 법한 우버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잡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내 앞에 선 신사 같은 그 남자. 콧대가 오뚝하고 깊이 있는 눈매에 키도 멀대 같이 큰 것이 인물이 좋다. 번뜩이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멋스럽게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그리고는 다른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다. 그리고, 성냥을... 바닥에 그대로 버리는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장면이었다. 내가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끔뻑이자, 그는 다시 한번 보여주고 싶은지(불이 붙지 않은 것이었다) 성냥을 꺼내 바닥에 내동댕이 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런던 거리의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스크래치는 기본, 아무렇게나 뱉어놓은 껌이 바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 겉은 멀끔한데 생각보다 지저분하구나, 런던은. 마치 겉보기엔 멀끔한데 화장실을 다녀와 손을 씻지 않고 냉장고 문을 벌컥 열던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버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 매니저를 만나고 근처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 와 요리해 먹었던 첫날,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각에 일어나 여행 계획을 세우며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 시작 3시간 전에 신청했으니 할 말은 없다. 신청한 투어가 줄줄이 취소되었던 것이다. 취소되는 이유는 만석이거나, 최소 인원이 모집되지 않아서였다. 런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으므로 나는 이른 새벽, 부엌 한 귀퉁이에 앉아 숙소 앞에 펼쳐져 있던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은 '노팅힐'. 오래전, 동명의 멜로 영화 <노팅힐>을 재밌게 본 기억이 있어 오늘은 이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노팅힐을 주변으로 유명한 빈티지 마켓인 포토벨로 마켓도 있는 모양이었다. 전날 유로스타를 타느라 몸이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무리해 일정을 소화하고 싶지 않았던 그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런던에서는 일주일이 조금 되지 않는 기간을 머물렀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노팅힐 역에 가기 위해 숙소 근처의 빅토리아역으로 이동하는 길.  파리 특유의 고릿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대부분의 옷을 세탁 맡겨 걱정했는데, 다음날의 날씨는 다행히도 따뜻했던 것 같다. 숙소는 빅토리아역과 핌리코 근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함께 방을 썼던 룸메이트로부터 핌리코는 런던에서 '한남동'같은 입지의 동네라고 한다. 첫날 우버를 타고 들어와 다음날부터 빅토리아역만 이용했으므로 핌리코역을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동네가 깨끗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런던에서 보기 드물게 아침이면 러닝하는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받았던 빅토리아 역에 대한 인상은 마치 고속터미널역이 떠올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역 안을 돌아다니는 비둘기들. 거리로 나온 노숙자. 기차와 열차가 뒤섞여 있던 역사 안.


나는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하기 위해 자판기를 찾다 충전소만 발견되어 역 근처에 있던 안내소에 갔다. 런던에서는 오이스터카드가 베이직과 여행자용이 있었는데, 직원은 내게 얼마 정도 있을 거냐고 묻더니 여행자용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나라별 교통카드를 모으고 있으므로 고개를 저었는데, 그러면 20파운드 정도를 충전해 쓰는 게 좋겠다는 추천을 받았다. 처음엔 환율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20 파운드면 약 47,000원 정도 금액이고, 런던의 교통비는 1회에 5,000원인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저씨의 예측은 맞았던 것 같다. 런던에선 대부분의 거리를 걸어 다녔고, 힘이 들거나 일부러 버스를 타고 싶어 탄 것을 제외하고는 20 파운드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하며 깨달은 한 가지. 파리와 다르게 영국의 억양은 정말 사투리 같았고, 빠르고, 잘 못 알아듣겠더라. 특히나 역무원 아죠씨, 정말 억양이 세서 내가 몇 번이고 "쏘리?" 했던 기억이 난다.



노팅힐과 포토벨로 마켓을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셜록홈즈 박물관까지. 런던을 지나다니는 동안 서점 또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계가 펼쳐져 있어 내가 마치 비현실적인 세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진짜 낭만적인 도시는 런던이 아닌가. 해리포터가 납작해져 있던 버스는 흔하고, 셰익스피어의 고장이며, 셜록홈즈는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휴그랜트가 남색 문에 기대어 윙크하는 것은 기본, 거리를 조금만 걸어도 서점이 발에 채이듯 나타나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야만 했으니까.



런던에서의 첫날은 그야말로 평소 런던에 갖고 있던 환상을 마음껏 채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학시절 즐겨 보던 유투버 언니는 두 사람 다 영국에 거주했다. 당시 언니들이 한국에 오면 언니를 보러 가겠다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팬밋업 장소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같이 사진을 찍는 동안 무척이나 신기해했었지. 그뿐인가. '벨비타'라는 과자를 마음껏 먹으며 일을 하는 내 모습은 마치 언젠가 내가 꿈꾸던 커리어우먼의 로망을 실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실제 서울에서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내가 동경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한편 런던은 오후 네 시가 되면 해가 저물기 시작했기 때문에 네 시가 되면 신데렐라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 서둘러 귀가를 했던 것 같다. 거리의 많은 가게들이 여섯 시에 문을 닫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거리엔 가끔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아홉 시가 한낮이라면, 이곳에서의 아홉 시는 한밤중이라는 얘기다. 덕분에 런던에서 오래 잠을 잘 수 있었고, 근처 마트에서 직접 식재료를 사와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런던에서의 둘째 날은 그런 기억이다. 여행보다는 잠시 거주하러 온 것 같은 느낌. 그렇게 개운한 잠을 자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이 또 기대가 되었고, 그다음 날도 기대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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