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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Dec 04. 2024

그림을 받아들이는 시간, 사람을 이해하는 시각

#13 브뤼셀 (D+11)

벨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인접국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화와 유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다. 벨기에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랑플라스와 와플이 전부였다. 아, 여행을 위해 사전에 정보를 조사하며 오줌싸개 동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최근에 오줌싸개 동상이 새겨진 병따개를 선물 받기도 했으니까.



벨기에를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아름답다는 인상이 있었다. 그러나 여행지를 조사하며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은 치안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이야길 들었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두려움이 컸던 도시가 어디였느냐고 묻는다면,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이다. 잘 알려진 정보가 없기도 하거니와 치안이 좋지 않기로 가장 많은 코멘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미디역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은 사실 좋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역 주변 길가에서 웬 남성이 거리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고(그게 뻥 뚫린 공중화장실이라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보드를 타는 청소년들은 내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부끄럼 없이 해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브뤼셀 역에 도착했다. 온갖 걱정을 하던 차에 그 와중에 하늘빛은 어찌나 아릅답던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던 도시는 수줍어 보였고, 상냥해 보였다. 그 마음에 속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도 같다.


브뤼셀에서는 하루만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에 따로 교통카드가 필요하진 않았으나, 일본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은 교통카드. 나는 교통카드를 모으고 있기 때문에 카드를 발급받겠다며 역 안쪽의 자판기 앞을 기웃거렸다. 그런데 역사내의 자판기엔 카드를 발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었으나 현금결제가 안 되는 거다. 사전에 정보를 조사했을 땐 최대한 카드 결제를 할 때는 카드를 꽂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현금을 쓰려했다. 소매치기도 걱정이 되고, 카드 결제도 걱정이 되고. 시간은 점점 흘러 저녁시간이 훨씬 넘어가고 있고. 그 와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혹시 티켓 필요해?”

“네.”

“이거 10유로에 사가.”


그의 손에는 티켓이 한 묶음으로 들려 있었다. 카드였다면 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짐이 완전 무거웠던 데다 피곤함까지 겹쳐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나는 기필코 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안 돼요. 저 교통카드 모으거든요.”


순간 그 할아버지를 경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 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까. 암표상 같은 아죠씨가 아닐까 싶었다. 내 말에 그는 그런 걸 왜 모으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번엔 손가락을 들어 역무원이 있는 사무실을 알려준다.


“저기로 가봐. 그런데 카드값 비싸. 왜 그런 걸 모아?”


그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찌 됐건 나는 카드를 사러 역무원을 만났고, 그 역시 나에게 왜 굳이 카드를 사냐며, 오히려 원데이 티켓을 추천해 주었다.


“제가 나라별로 교통카드를 모으거등요.”


쑥스럽게 말하며 전날 구매한 그리핀도르 목도리를 쭉 잡아당기는 내 모습이 그는 귀찮은 얼굴로 턱을 괸 채 내게 총 8유로를 달라고 했다. 카드 값이 6유로, 1회 교통요금이 2.7유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도착한 시모네역. 역에서 내려 구글 지도를 따라 가는데 길거리가 너무 예뻐 자꾸만 찰칵하고 찍게 되는 거리의 풍경.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 자전거를 탄 아죠씨가 등장했다. 그는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먼저 지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처음 마주했던 시모네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온통하늘이 분홍빛이었던데다 거리는 조용하고,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건물들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가 가보았던 곳들 중에 아마도 건축물이 가장 낭만적으로 지어진 도시가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감상에 빠져 있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한국어.


“나그네 민박 가세요?”


처음엔 무슨 소리가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인 없고 아까 내게 길을 비켜준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고 있지 않는가. 누가 봐도 여기 현지 사람인데?


“어... 네!”


내 말에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이에요. 바로 여기. 같이 가요.”


그는 열쇠를 내어 보이며 자전거를 주차해 두고는 내게 따라오라고 했다. 순간 그를 따라가도 될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이미 내 몸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해 가는 중이었다. 민박집으로 가려면 총 세 번의 보안장치가 있었다. 열쇠를 세 번을 열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마주한 사장님. 원래는 저녁에 나갈 계획이 없었는데 함께 방을 쓰게 된 친구들 덕분에 밤 마켓을 나갈 수 있었다. 다 덕분이다. 덕분에 그랑폴리스의 야경을 볼 수 있었고, 밤하늘의 별을 세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날 밤에 뱅쇼 반 잔과, 맥주 두 모금에 취해 렌즈도 빼지 않고 잠들어 버렸지만.



다음날 갔던 왕립미술관과 브뤼셀 왕궁, 그리고 길거리와 빈티지숍, 비누 가게가 기억에 남는다. 예상외로 나는 왕립미술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자존감이 얼마나 높은지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온통 방 한 면이 사람들과 이야기로 구성된 그림들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속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골치가 아파 나도 모르게 정물화나 풍경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브뤼셀에 와서 나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보았던 그림들, 그리고 큐레이터의 해설을 엿들으며 걸었던 시간들. 여행 11일 차가 되니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내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때 부터였던 것 같다. 신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 말이다. 한편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각도 이렇게 키워가는 게 아닐까 싶다. 처음엔 오직 나만을 궁금해하고, 나만을 생각하다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게 아닐까.



브뤼셀에선 비누를 하나 샀다. 마침 한국에서 구매한 폼클렌징과 런던에서 구매한 샴푸가 다 떨어져 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비누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직원과 (갑자기?)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이름도 모르는 그 친구. 어쩌면 나보다 한참은 어릴지도 모르는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랑플라스를 보러 갈 때는 반드시 예쁘게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길, 나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랑플라스에 있으면 그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빛이 날듯 아름답다.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 광장이 왜 브뤼셀에 있는지도 알 듯하다.



그날은 길을 조금 헤매느라 오후시간을 모두 써버렸지만 브뤼셀에서 보냈던 하루를 나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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