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브뤼셀~암스테르담 (D+12)
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열차가 유로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건 출국 하루 전의 일이다. 전날까지도 예정되어 있던 일정에 허덕이느라 정신없이 일상을 보내다 티켓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유로스타로 예매를 해두었던 파리~런던~브뤼셀 구간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경로가 문제였다. 티켓은 어딘지 모르게 허접해 보였고, 느낌상 현지 열차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까? 브뤼셀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걱정이었던 건 이 경로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첫날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사장님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이 티켓을 아느냐고 물었다. 설상가상으로 민박집 사장님도 이런 티켓은 처음본다고, 잘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니, 브뤼셀에 20년을 넘게 거주한 사람도 모르는 티켓이라고? 유로스타 한국지사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곳에서도 모른다는 답변만 들려줄 뿐이었다.
그냥 다시 유로스타를 예매할까? 유로스타로 예매한다면 약 80유로 정도의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안전한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사장님이 아무래도 IC 열차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너무 걱정이 많은 편인 것 같아. 내가 보기엔 인터시티라고, 한국의 KTX 같은 열차 같은데, 유럽 간 이동하는 그 열차의 티켓 같아요. 센트럴역에 가서 한 번 물어봐요. 유로스타보다 더 나은 티켓일수도 있어.”
사장님의 그 한 마디에 긴장이 조금 풀렸으나 이어 민박집에 묵는 다른 친구들도 이 열차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는 듯했다. 두려움을 안고 출발한 센트럴역.
체크인 시간이 필요한 유로스타와 다르게 인터시티는 조금 더 간소화가 되어 있어 일찍 도착할 필요가 없었다. 12시 출발. 그전에 마지막으로 브뤼셀에서 둘러보고 싶은 곳들을 찾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던 그랑플라스의 전경도 한 번 더 보고 오줌싸개 소녀 동상도 보고, 민박집 사장님이 추천해 주었던 쇼핑센터도 둘러보았다. 와플가게의 고소한 향내를 맡으며 잠시 스타벅스에 앉아 있다. 근처 편의점에서 직원의 추천을 받아 벨기에 대표 간식을 추천받기도 했다.
그렇게 타게된 인터시티 열차. 내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더럽지 않았고, 유로스타보다 더 편했던 것 같다. 이후에 헤이그를 갈 때에나 잔세스칸스를 갈 때 나는 인터시티와 스프린터(청춘열차 같은 개념인 것 같다)를 편하게 이용하곤 했다.
암스테르담이 종점인 열차가 아니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며 몇 번이고 옆 자리의 승객들에게 역 명을 물어봤던 것 같다. 옆자리에 앉은 승객은 영국인 억양을 지니고 있었다. 50대 정도로 추정되는 4인 노부부였는데, 내가 자주 두리번거리다 간식을 까먹다, 책을 읽다, 모자를 고쳐 쓰며 위치를 물어보니 나를 귀여워해하며 자기들도 암스테르담에 내린다며,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게 몇 살이냐, 혼자 여행 왔냐 그런 것들을 묻더니, 내릴때 쯤 스물아홉이라고 대답하자 매우 놀라워했다.)
암스테르담 센트럴역 역시 사전 조사 때에는 브뤼셀보다 더 위험하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래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처음 마주한 네덜란드의 첫 인상은 매력적인 강인함이 엿보이는 도시였다는 거다. 거리 곳곳엔 약에 취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홍등가는 불이 꺼질 줄을 모르며 밤거리가 가장 위험한 도시라는 인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마주했던 첫 인상은 ‘아름답다.‘ 처음 파리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더 감동적인 행복이 몰려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입을 헤벌레 벌리며 한참이나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인생 첫 트램을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길, 가는 길에 마주했던 암스테르담 곳곳은 내가 방문했던 그 어느 곳보다 현대적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네덜란드의 수도이기 때문에 가장 현대화가 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였고, 행복감에 땅이 들썩이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이곳 네덜란드가 아닐까 싶다. 평소였다면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기 때문에 숙소에 가만히 붙어있었겠지만 내가 경험한 암스테르담의 첫 인상은 아직 한낮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아까워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모르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반고흐 미술관이 보였고, 그 옆에는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하얀 원반 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얼굴로 스케이트장 안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첫날 저녁을 이대로 보내기 아쉬워 근처에 있는 ‘하이네켄 체험장‘에 갔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본 적이 있었다. 반은 호기심에 입장료를 끊고 들어갔는데, 웬만한 마블 시리즈를 보는 것보다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갓 뽑아낸 신선한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실 때는 ‘맥주가 이렇게 맛있다고?’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생맥주와 캔맥주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 나는 평소보다 차분해진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아. 네온사인 조명에 흥겨운 분위기의 맥주 박물관에 취해 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민박이 아닌 호텔을 묵게된 상황에서, 나는 하루의 짐들을 정리하고, 다음날의 일정을 계획하고, 그간 내게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던 것 같다.
여행 12일차. 인터시티 열차를 이용하며, 나는 그동안 내게 모르는 세계에 대해 얼마나 보수적이고 큰 불안감을 안고 지내왔는지에 대해 되돌아보았던 것 같다. 세계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모르는 것들 앞에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귀찮고, 어렵고, 두려운 것 투성이이지만. 이런 일들을 겪어나가며 앞으로 나는 조금 더 용기를 가지게 될 것 같다.
아무튼 오늘 밤은 하이네켄! 하이네켄! 하이네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