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학원은 파란식당에서 오 분 정도 쭉 걸어가면 나온다. 빨간 벽돌 빌딩을 흉내낸 벽돌 페인팅이 그려진 건물. 건물은 지어진 지 오래되어 무척이나 낡았는데 2년 전에 리모델링을 해서 시설이 많이 좋아졌다고, 첫날 원장선생님이 상담을 하는 동안 테이블 위로 침을 튀기며 뱉은 말이었다.
“사람은 오래될수록 깊어지고, 물건은 새것이 좋다고 하잖아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운전석에 앉은 엄마는 ‘오래될수록 깊어진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새로운 학원에서 새롭게 만나 적응해야 할 친구들을 걱정하는 동안 다른 깊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종종 인터넷에 암스테르담에 대해 검색해보곤 한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수도이기도 하고, 암스테르담은 커다란 풍차가 돌아가는 풍경으로 유명하니까 주로 풍차와 튤립 사진이 나온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 도시보다는 시골의 풍경. 엄마는 그곳에서 그만뒀던 공부를 다시 할 거라고 했다.
‘서진아, 엄마는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런데 서진이처럼 더 쑥쑥 커서 올 거야.’
반년 전, 엄마는 내게 떠나도 되겠느냐는 허락 따윈 구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결정이 난 뒤에 통보하듯 이야기해 놓고는 훌쩍 서울을 떠나버렸다. 그래놓고는 설득이니 이해니 내게 그런 것들을 강요했다. 나는 나를 떠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엄만 나를 설득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안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이윤정’이라는 사람 그 자체라는 걸. 엄마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떤 마음들은 그걸 알면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아서 때로는 없는 것 같다고 여겨진다. 엄마는 나를 떠난 뒤에도 자주 연락을 해오곤 했지만 내가 엄마로부터 원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자라오면서 크게 갖고 싶은 것이 없었다. 호기심이 가는 것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하면 나는 쉽게 포기하는 유형의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마트에 가거나 장난감이 잔뜩 모인 곳에 가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 나이에 맞지 않게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설 줄 알았다. 가끔 가다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바닥에 등을 대고 울어재끼는 아이들을 볼 때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실은 그만큼 원하지 않아서, 다 가지지 않아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내가 바라는 게 있었다면, 엄마가 암스테르담으로 가지 않는 거였다. 언제나 내 방에서, 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곳에 엄마가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나는 그날도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가지 말라는 말도, 왜 내게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무작정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는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떠난 뒤 반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버린 것만 같다.
“김서진. 학원 가냐?”
이준오였다. 이준오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네시가 훌쩍 넘은 시각. 여름이라 그런지 아직 주변은 환했다. 쟤는 뭔데 자꾸 말을 거는 건지. 뜬금없이 친한 척은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캠프를 같이 하자고 꼬드기는 건 뭔지. 전학생 주제에 너무 나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이준오가 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밥 먹었어?”
이준오가 손가락으로 제 교복을 툭툭 가리키며 물었다. 이준오의 시선을 따라 내 옷의 같은 부분을 보니 가지덮밥의 양념이 조금 묻어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양념을 닦았다.
“나는 이제 주번 끝났는데. 좋겠다, 야.”
“그럼 너도 먹어. 파란식당이야. 이제랑 먹었는데.”
“홍이제?”
“그래.”
이준오는 이제, 이제... 하다 얼굴을 조금 찌푸리더니 ‘아, 옆반 걔.’하고 작게 말했다.
“그래, 너 보러 매시간 찾아오는... 아니아니 아무튼 내 친구.”
“알아. 나 보러 오는 거.”
“그래. 아니, 뭐?”
“홍이제 나 좋아하잖아.”
“너... 알고 있었어?”
이준오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이준오의 저 뻔뻔한 태도가 당황스럽기도 했고, 이제가 이준오를 좋아하는 건 비밀인데 이렇게 쉽게 들켜버린 것이 맞나 싶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운동화로 바닥면을 질질 끌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잠깐 고민하는데 이준오가 먼저 말했다.
“야, 나 좋아하지 않는 애들도 있어? 너 빼고 나 다 친하잖아.”
아, 이준오는 원래 저런 캐릭터지.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런데 이준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준오는 모두가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농담도 잘하고,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마다 이준오도 있기 때문이다. 이준오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웃고 있다. 아마 그런 이준오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나는 그런 게 싫었다. 실 없이 밝은 애들. 내 마음은 항상 꽁꽁 얼어붙은 겨울인데, 겨울이어서 봄 같은 애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적응이 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이준오는... 여우처럼 요리조리 다니는 모양새도 별로다. 이제는 이준오 같이 다정한 친구가 좋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아마도... 이제는 이준오의 잘생긴 얼굴 때문에 홀딱 반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거 하나는 나도 인정하는 바니까.
“나도 이쪽으로 가는데 같이 가도 돼? 학원까지 데려다줄게.”
이준오가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가방을 고쳐맸다. 나는 알 수 없다는 듯 이준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왜 나를 데려다줘?”
학원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잘만 갈 수 있는데 데려다주긴 뭘 데려다줘. 내 물음에 이준오가 표정을 조금 구기며 대답했다.
“됐다, 됐어. 그냥 같이 가자고. 할 말도 있고.”
이준오는 나보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걸음이 빨랐다. 이준오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이고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는데 나는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이준오의 빠른 걸음걸이를 맞추느라 다리가 아프고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준오에게 조금 천천히 걸으라고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런 건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뒀다. 여기서 몇 분만 더 걸으면 금방 학원이기도 하니까.
학원까지 가는 길은 한쪽에는 큰 도로가 있고 그 앞으로 키가 크고 잎이 넓은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계절의 변화를 알게 된다. 봄에는 작게 가지와 잎이 자라나고, 여름이 되면 가장 무성해진다. 가을이 되면 초록빛의 잎들이 거짓말처럼 붉게 물들고, 겨울이 되면 그게 다 어디 있었냐는 듯 앙상함만 남아있다. 하교길마다 나는 그 길을 가장 좋아했는데 지난겨울과 봄은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때는 온 신경이 우리 집에만 가 있었으니까.
“나는 네가 캠프 신청 안 할 줄 알았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준오가 내쪽으로 손을 튕기며 물었다. 맞다, 캠프. 이준오도 캠프를 한다고 했지.
“응. 원래는 할 생각 없었어. 나는 학교 행사에 관심도 없고...”
“그래서 의외였어. 너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많은 일들에 좀체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 뭐랄까, 다들 한심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달까.”
“한심하다고까진 생각하진 않고. 그냥... 당장 나 한 명 관심 갖기에도 벅차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그런 점이 다른 애들이랑 다른 것 같아. 보통 애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는데. 너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살잖아. 애들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냥 나는 내 갈길을 간다. 나도... 실은 그런 생각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거든. 알다시피, 나는 이번이 전학만 세 번째야. 아무래도 애들이랑 빨리 어울리려다 보면... ”
“알아. 네가 뭘 걱정하고 나에 대해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근데 네가 부러워하는 내 성격 같은 거. 이미지 같은 거. 나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그냥 신경이 온통 다른데 쏠려있다 보면, 아니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다들 다를 거잖아. 나는 그게 지금 학교가 1순위는 아니라는 거지. 너는 학교가 1순위라고 생각하는 거고. 그런 차이 아닐까.”
내 말에 이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인생의 1순위는 뭔데? 성적표? 아니면... 연애? 너 뭐 있어?”
“무슨... 너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걸 묻냐.”
“뭐... 같은 반 전학생의 자격으로?”
맥락 없이 맞받아치는 이준오의 뻔뻔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 인생의 1순위.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내 인생의 1순위는 아마도 집이겠지. 그리고 내 방과 내 방을 잇는 가족들이 내 인생의 1순위다. 이준오는 아마도 친구들이 1순위겠지. 이준오는 언제나 활발한 성격인 척 하지만 실은 원래는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틈에 끼어 있었도 가끔은 억지스러운 웃음과 태도를 하고 있을 때가 있으니까.
“근데, 너 실은 캠프에 신청한 거 수도꼭지 때문이지?”
“수도꼭지?”
“이거 여기 학교에서 유명하던데.”
이준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세를 낮추고는 내게 거의 귓속말을 하듯 작게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 소원을 빌어주는 수도꼭지가 있다는 거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마지막 수도꼭지는 오래전에 고장이 나 물이 나오지 않는 고장 난 수도꼭지다. 그런데 밤 12시에 그 수도꼭지를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무조건 1개는 이루어진다는 거다. 애들 대부분이 그 수도꼭지를 문지르기 위해 캠프를 신청한 거라고, 이준오는 아마 나도 그런 이유로 캠프를 신청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준오는 학교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 나는 이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는데 그건 아마 내가 원체 학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어서 그럴 거다.
“몰랐어.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그런 걸 믿는 애들이 있구나.”
“믿는 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진짜 이루어질 수도 있잖아.”
이준오가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하나 있거든. 소원.”
“뭔데?”
“나는... 다음에 세화고 졸업식에 꼭 올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런 소원을 빌려고 해.”
“세화고에서 졸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세화고 졸업식에 오게 해 달라는 건 뭐야?”
“우리 엄마가 말해줬거든. 소원을 빌어도 실현 가능한 정도를 빌어야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다고. 아마 나는 곧 또 전학을 가게 될 것 같아. 그러면 세화고에서 졸업하는 건 터무니없는 소원이겠지. 그러니까 세화고 졸업식에 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다시 여기서 만난 애들을 또 만나고 싶거든.”
생각해 보면 이준오 다운 소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오는 아빠의 직업 특성상 어릴 때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땐 이사를 가는 것이,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 신나고 즐겁기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속상했다고 덧붙였다. 이준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준오가 내게 물었다.
“너는? 너는 만약에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준다면?”
“나는....”
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 소원은 단 한 가지. 그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거다.
내 소원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원 그런 거 없어. 빈다고 이뤄지지도 않을 거고.’
펜촉이 굵은 볼펜으로 노트를 직직 그었다. 힘을 많이 준 탓에 눌린 종이의 뒷면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금세 찢어질 것 같았다.
‘이뤄지면, 이뤄지면 어쩔 건데?’
내게 그렇게 말하던 이준오의 얼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을 때, 이준오가 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기에 나 역시 이준오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 지렁이라도 붙었나 싶어 보도블록을 살펴보다 이준오를 올려다보았다. 이준오는 나보다 반 뼘 정도 컸는데 왠지 모르게 그게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턱을 척 하고 위로 치켜들었다.
“왜, 왜 그러는데.”
이준오는 나와의 눈싸움에서 한참을 지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의 테두리가 갈색빛인 나와 달리 이준오의 눈동자는 깊은 검은색이었다. 이준오의 눈동자 속에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내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원 말이야. 이뤄지면 어떡할 거냐고.”
“소원이 이뤄지면 좋은 거고, 안 이루어지면...”
“이뤄지면 너도 내 소원 들어줄래?”
“소원? 소원이 또 있어?”
“어. 있어.”
이준오가 다시 앞장서 걸었다. 나는 대답 대신 괜히 보폭을 넓히고는 이준오의 그림자를 밟았다.
“소원이 뭔데? 나는 가능한 것만 해줄 수 있어. 막 전재산 이런 거는...”
“그건 이뤄지면 말해줄게.”
“......그래.”
“그런데 만약에 소원을 빌면, 서진이 너는 어떤 소원을 빌고 싶은데?”
이준오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번엔 발밑으로 이준오의 그림자가 아닌 지난 계절에 떨어진 듯한 마른 낙엽이 밟혔다. 지난가을. 내 소원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 시간을 되돌린다면 지난가을로 되돌릴 것이다.
지난가을에 엄마는 나와 아빠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갔으니까. 부산도 있고, 가까운 일본도 있는데 엄마는 이곳 서울에서 무려 열세 시간이나 걸리는 암스테르담에 왜 가야만 했을까.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엄마를 그곳에 가지 못하게 조금 더 말리고 싶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나를 왜 설득하고,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말을 했었는지. 그때 나는 엄마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동의하는 편이었지만 그게 나를 떠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가을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내 말에 이준오가 왜? 하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낙엽...’이라고 말했다.
“낙엽? 낙엽이 왜?”
“그냥. 낙엽이 갖고 싶어서.”
내 말에 이준오가 푸하하 하고 웃었다.
“낙엽은 곧 또 볼 수 있잖아. 가을은 되돌아오니까. 설마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
이준오가 너무 심하게 웃길래 옆에 있던 나도 괜히 허허, 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가로수길을 지나왔고 금세 가까이에 학원 건물 간판이 보였다. 이준오가 갈림길 중 하나를 가리켰다.
“데려주는 건 핑계였고, 나도 이쪽 방향으로 가야 했어. 너랑 이야기도 해보고 싶었고. 너도 어딘지 모르게 재밌는 애구나. 재밌는 생각도 많이 하고.”
낙엽 얘기 괜히 했나. 왜 잘 모르는 애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바보 같아 보였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준오가 제 한쪽 어깨를 톡톡 쳤다.
“너 가방끈 뒤집어졌어. 어깨 아프겠다.”
“어... 어. 고마워.”
“그리고 낙엽. 네 소원도 이루어지면 좋겠다. 지난 낙엽까진 모르겠지만 가을이 오는 건 시간의 순리이고, 너는 결국 반가운 낙엽을 볼 수 있겠네.”
“뭐, 그렇지. 그런 단순한 소원은 아니지만.”
나는 이준오가 내 말의 뜻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준오의 이런 헛스윙 같은 반응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준오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저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네게 일어났으면 좋겠어. 네가 생각하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말이야.”
“......”
“가끔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잖아? 너무 하찮아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뒤통수를 치듯 이뤄져 버리는 그런 작은 순간들 말이야. 네 소원이 이뤄지면 내 소원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거든.”
“낙엽 속에 숨은 진짜 내 소원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말이 안 되는 소원이지만, 가능성이 0%는 아닌 것. 맞아?”
“아니. 제로. 0%야. 가정부터가 성립이 안 되거든. 그래서 나는 내 소원이 이뤄질 거란 기대를 안 해. 앞으로도 안 할 거고. 생각해 보면 쓸모없는...”
내 말에 이준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내 말을 잘랐다.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이준오의 마지막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영원하지 않은 것만이 영원하거든. 상태가 두 가지뿐이라면 반드시 네 소원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 네가 진짜 갖고 싶은 건 지난가을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낙엽이니까. 지금 이 발밑에 있는 잎사귀는 지난가을일까, 더 오래된 가을에 만들어진 걸까. 뭐, 네가 믿기 나름이겠지. 어때? 이건 성립이 되겠어?”
“그런 단순한...”
“소원을 빌 때도 가능한 방향으로 계산을 잘해야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능성에는 계산적이면서, 이뤄진다는 가능성은 오답투성이잖아. 문제를 이렇게 편애하면 되겠어?”
이준오의 말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학원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를 꺼내는 일이었다. 노트 위엔 온통 ‘소원’이라는 글자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트 속 글자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목이 말랐다. 집엔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조용했다. 아빠는 아마도 늦게 들어올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정수기는 일정량의 물만 흘려보내주고는 금세 조용해졌다. 적막을 깨는 것은 때맞춰 온 엄마의 카톡이었다.
[이제야, 엄마 그럼 그날 비행기표 끊는다.]
[엄마 만나줘야 해.]
엄마가 보내온 날짜는 밤샘독서캠프가 있는 날이었다. 엄마는 10일 정도 한국에 머물렀다 일본을 경유해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거라고. 나는 엄마가 보내온 사진 몇 장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온종일 있었던 일은 피곤하기만 하고,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암스테르담. 엄마. 밤샘독서캠프. 홍이제. 오디션. 이준오. 소원.
몇 번을 되뇌다 식탁 위에 물컵을 딱 하고 내려놓고는 침대로 걸어갔다. 아빤 무서우면 자기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불을 켜 놓고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아빤 생각보다 날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무서워서 불을 켜놓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불을 켜 놓는 건데. 생각해 보면 엄마도 종종 사람이 없는 거실에 불을 켜 놓고 일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번역가인 엄마는 내가 잠에 드는 시간에 서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스탠드를 켜 놓고 조용히 일을 하곤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엄마는, 산타 할아버지가 온다는 크리스마스 전날에도 일을 했으니까. 엄마가 일을 할 때면 고요한 집안에는 금세 기계식 키보드가 타닥타닥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리고, 볼펜으로 종이 위를 직직 긋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잠든 시각에 고요히.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터무니없는 소원은 비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산타 할아버지는 모두가 잠든 시각에 집에 방문한다고 했지만 우리 집은 모두가 잠드는 시각이 있었던 적이 없으니까. 아빠가 깨어있을 때 엄마는 주로 잠을 잤고, 엄마가 깨어 있을 땐 아빠가 잠들거나 내가 잠들어 있는 편이었으니까.
여전히 엄마는 내가 잠든 시간에 일을 할 것이다. 서울보다 암스테르담은 14시간 정도 시간이 느리다. 나의 과거가 엄마에겐 현재가 되고, 엄마의 미래는 곧 나의 현재와 연결된다.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또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알지 못하는 어느 강변에서 두 팔을 한껏 펼치고는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그전에는 식당에서 빵을 먹는 사진도 있었고, 풍차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고... 엄마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저마다 소원은 어떤 기준으로 빌게 되는 걸까. 소원을 빌 때는 정말로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준오는 왜 그런 이상한 소원을 빌려고 하는 걸까.
‘세화고에 다시 오고 싶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얼굴. 이준오는 그 말을 하면서 싱긋 웃어 보였는데 어쩐지 억지웃음을 짓는 것만 같았다. 이준오는 늘 웃는 얼굴이다. 나는 처음에 이준오가 잘 웃는 애라고 생각했다. 전형적으로 타고난 웃는 상. 그런데 조금 전의 이준오를 겪으면서 이준오는 불편할 때에도 그냥 웃어버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웃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영어 듣기 평가를 할 때 정답을 찾지 못해 웃어버리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을 때 침묵을 견디기 힘들 때, 어떻게든 알 수 없는 빈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을 때 그저 입꼬리를 올리면 무어라도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유형의 사람.
엄마가 떠난 뒤로 아빠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빠는 이준오 같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무어라 쓴소리를 할 때에도 내 눈치를 보며 그저 웃고 마는 어른이 바로 아빠였다. 얼마 동안은 엄마가 떠난 뒤에도 아빠는 웃으면서 나와 주변을 대했다. 어른들은 아빠에게 이상하다고 했다. 어떤 어른은 아빠가 잘 웃어서 이상하다고 했고, 또 어떤 어른들은 이상하리만치 웃고만 있어서 이상하다고 했다. 또 어떤 어른은 애엄마가 애를 떠났는데 웃음이 나느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주로 나이 많은 어른들이었다. 아빠가 웃음을 그친 것은 내가 더 이상 아빠의 웃음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부터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의 웃음을 믿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자란 아이들은 금세 가짜가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생긴다. 독립적인 사람은 실은 자라오며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강해지는 방법밖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가짜를 안다는 건 눈치가 빠르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더 정확히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을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걸 미리 깨닫는 건 좋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지. 그리고 항상 사람에 대한 나의 예측과 판단이 맞다는 확신이 생길 때면 되려 불안해지기도 한다.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듯 손에 쥔 것들을 더 욕심부리기 위해 부러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그런 모든 게 너무나도 정확히 보였다. 그래서 누구도 믿기 힘들어지니까. 외로워지니까. 이런 능력을 확인받을 때면 세상이 공평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내가 남들보다 무엇인가를 타고날 때에는 그만큼의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가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가짜 웃음을 지니는 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빠는 누구도 믿지 않아서 웃음으로 스스로의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처럼. 나는 억지웃음 같은 건 할 수 없으니까. 그저 눈치챈 것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준오가 불편했다. 이준오가 꾸미는 가짜와 이준오의 진짜가 너무도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어서. 이준오도 아빠와 같은 종류의 사람인 걸까? 전학을 오기 전의 이준오는 어떤 아이였을까? 이준오의 소원은 왜 그것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래도 나는 이준오의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같은 반이거나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냥 이준오가 이준오가 아니었대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삐비비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아빠가 일찍 집에 들어온 듯 보였다. 터덜거리는 발걸음 소리. 구두를 벗어두고 다시 신발장으로 몸을 굽히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소리. 방으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어내는 소리. 화장실에 들어가면 곧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방에 들어간 후엔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빠의 하루는 언제나 정해져 있다. 아주 늦은 저녁에 들어올 때에도, 일찍이 들어올 때에도. 엄마가 떠나기 전에도 아빠는 늘 그랬다. 가끔 내가 필요한 게 있어 방문을 두드릴 때면 아빠는 언제나 다정한 얼굴과 말투로 나를 대해주곤 했지만 나는 언제나 아빠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느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아빠는, 내가 먼저 다가가기 전에 먼저 다가오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진아.”
멍하니 노트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밖으로 아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 똑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아, 자니? 아빠가 할 얘기가 있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문 손잡이를 넣고 돌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이 5년은 함께 살았다는 이 집은 이미 오래되고 전에 살던 사람들의, 그전에 살던 사람들의 손때가 타 종종 문 손잡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손잡이 안쪽에서 철컥이는 소리 대신 헛스윙만 하는 것 같았다.
“문이 또 고장인가 봐.”
몇 번이고 더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같은 상황만 반복됐다. 이번엔 아빠가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여기서 얘기해. 아빠.”
문을 사이에 놓고 아빠는 몇 번 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문고리는... 아빠가 시간 나는 대로 고쳐 놓을게. 이번에 이렇게 된 거 새 걸로 바꾸는 게 좋겠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문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몇 번 툭툭 쳤다. 나는 문 옆의 빈 벽에 기대어 아빠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웃긴 상황은 아닌데,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으면 매우 우스꽝스럽고 이상하게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고 책상 앞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손톱을 닮은 초승달이 구름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아빠가 다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서진아.”
“응.”
“엄마... 연락은 받았니?”
“응. 다음 주에 온다고.”
“아빠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까? 아니면 외할머니집이나 호텔로 데려다주면 될까?”
아빠 역시 말을 마치고는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는지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아빠는?”
“나?”
“아빠는 그날 데려다 주기만 할 거야? 엄마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오는 거잖아.”
“아빠는...”
초승달을 반쯤 가리고 있던 구름이 유유히 내 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그림이나 사진 속의 구름들은 언제나 멈춰서 제 앞의 풍경들을 영영 가려버릴 것 같지만 실은 흘러가는 구름 앞에서 풍경들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짓궂은 반항이라면 아빠에게는 내게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별로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날 일이 있어서...”
“일이 있으면 안 데려다줘도 돼. 바빠서 그런 거잖아.”
“아니야. 마침 근처에 일도 있고.”
“근처가 어딘데? 공항? 외할머니집? 호텔?”
“......”
“아빠. 나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아도 돼. 나도 알건 다 아는 나이야. 왜 나한테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얘기하고, 대하는 거야?”
“아빠는 너한테 숨긴 거 없어.”
“그냥, 엄마가 불편하다고 해.”
“불편하지 않아.”
“불편한 거잖아. 아직 얼굴을 보는 게 싫은 거잖아. 나는 이제 혼자서 공항에 갈 수도 있고, 외할머니집을 갈 수도 있고. 호텔에 갈 수도 있어. 내가 다 스스로 할 수 있어. 꼭 그렇게. 나 때문에 뭔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듯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하는 거 하지 마.”
“그런 게 아니야.”
“맞아. 아빠는 늘 그래. 그런 거야. 나는 다 알아. 다 보이는데? 싫고, 불편하고, 별로인 그 마음들이 다 느껴지는데?”
내 말에 아빠는 말없이 고장 난 문고리를 몇 번 더 만지작거렸다. 문 너머에서 깊게 내쉬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아빠가 이 집에서, 나한테 그렇게 대할 때면... 있잖아 나는. 기분이 너무 별로인 기분을 느껴. 그리고 내 존재가 마치 짐이 된 것만 같아.”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더 잠을 자려다 졸리지 않아서 휴대폰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벽지 사이로 빛이 들어와 문을 보니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 아빠가 문을 열어 둔 모양이었다. 빼꼼히 문을 열고 거실을 보는데 집 안에 아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전날 나 때문에 일찍 회사에 간 것 같았다. 잠귀가 밝은 편인데도 밤새 아빠가 문고리를 잡고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잔다고 새벽 사이에 낑낑 거리며 문고리를 고쳤을 테지. 괜히 짜증이 나서 식탁 위에 있던 휴지를 뽑아 바닥에 던졌다. 그러나 곧 휴지를 던져도 치워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을 굽혀 휴지를 반드시 접어 식탁 위의 물기를 닦았다. 식탁 위에는 정확히 아빠가 물 잔을 놓아두었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아빠는 커피를 좋아했다. 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꼭 즐겨 먹는 사람이 아빠였다. 아빠가 마시는 커피는 항상 냄새가 좋아서 어릴 땐 빨리 아빠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야 커피를 빨리 맛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생각보다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최초의 순간은 빨리 찾아왔다. 초등학교 때, 집 안에 어른이 모두 없는 틈을 타 아빠가 마신 커피를 몰래 마셔본 적이 있다.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가득 퍼지던 진한 갈색의 커피. 내가 상상한 커피의 맛은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었는데 실제 혀 끝에 느껴지던 커피의 맛은 쓴맛 그 자체였다. 마치 사극에 등장할 법한 쓰디쓴 한약의 맛 같았다. 아직도 처음 커피를 마시던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맛보았던 첫 커피는 그랬다.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결괏값. 아빠는 무슨 맛으로 그런 맛을 좋아하는 걸까? 오래도록 나는 그것을 궁금해했다.
그러나 커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 역시 커피를 좋아했는데 엄마는 커피 원액에 우유를 탄 라테를 좋아한다면, 아빠는 물도 타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다른 점은 여기에도 있었구나. 어릴 때 엄마는 아빠가 쓴 커피를 마실 때마다 무슨 맛으로 이런 걸 사느냐고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엄마는 커피에 바닐라시럽과 우유를 넣지 않으면 그건 커피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가 뭐라 하든 항상 같은 방법으로 커피를 마셨다. 원액을 사 올 때도 있었고, 커피콩을 사 올 때도 있었고, 캡슐커피를 사 올 때도 있었다. 집 안에는 아빠가 사 모은 각종 커피 도구들로 주방의 한 벽면이 채워져 있을 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름망에 가루를 넣고 천천히 물을 부어 마시는 커피를 좋아했다. 주말이면 아빠는 여유롭게 커피콩을 갈고, 거름종이에 커피가루를 넣고 커피를 천천히 즐기고, 평일에는 커피머신을 이용해 빠르게 커피를 마신다. 그것만큼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거실에 커피 냄새가 풍기지 않은 날은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가 대신 커피를 마셨다. 엄마가 먹는 커피 냄새엔 항상 달콤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쓴 커피도, 달콤한 커피도 그 냄새가 벽지에 달라붙어 있던 그 순간을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카페에 갈 때마다 다른 애들처럼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나는 스무디나 에이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거실 테이블 위엔 오븐토스터기에 넣고 굽기만 하면 되는 빵이 놓여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빵집이었다. 아마도 전날 아빠가 주문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그럴 때 아빠의 눈치를 귀신같다. 내 머릿속에 담겨 있던 빵을 어떻게 알고 미리 사놓는 걸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전날 내가 아빠에게 했던 이야기도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아빠는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식탁 위에 있던 빵을 냉동실에 집어넣고는 다시 방으로 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졸음은 다시 눈썹과 눈썹 사이로 밀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