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절대로 가지 않을 길을 걷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불이 꺼진 복도를 아무도 모르게 걸어가는 그런 종류의 생각말이다. 대체로 내가 가지 않을 길은 다른 사람도 가지 않는 길이다. 혹은 길이 없는데 내 멋대로 걸어가며 그걸 길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열일곱 인생, 아직까진 한 번도 생각만 하던 일을 실행에 옮겨본 적은 없다. 생각뿐인 것들을 실행할 때는 대체로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 때어야 할게 아닐까. 혹은, 내가 가려는 길에 자신이 없을 때라거나. 아마 이준오라면 이런 결정과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해냈을 텐데 나는 이제와도 다르고 이준오와도 다른가보다. 불이 꺼진 복도로 나오기까지 나름 고민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런데 결정을 내린 후엔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뒤돌아보는 일 따윈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복도를 걷기 시작했을 땐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다. 몰래 복도를 나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가 화장실에 가든, 뭘 하든 크게 관심이 없었고, 캠프는 독서를 위한 다기보단 아이들의 추억놀음에 가까웠으니까. 선생님도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조금은 보장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앞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은 가져온 간식을 까먹으며 무어라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눈앞에는 컴컴한 복도와 창문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휴대폰을 제출한 터라 불빛 같은 걸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조심조심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니까 내 계획은 도서실에 몰래 들러 책을 한 권 가져오고, 돌아오는 길에 수도꼭지에 소원을 빌어야지. 소원은 이미 정했다. 내 소원은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가족끼리 데면데면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소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내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세화고는 건물의 양 끄트머리에 계단이 있다. 그리고 계단 옆에는 각각 화장실이 있다. 도서관은 행사가 있는 층의 바로 아래층에 있다. 나는 혹여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계단 무렵에 와 슬리퍼를 벗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미세하게 소음을 내는 존재는 나뿐인 것 같았다. 사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자 이제는 캠프가 있는 교실의 불빛이 희미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조용해지다 소란스러워지다, 아이들끼리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다가 금세 잠잠해지는 것이다.
나는 계단의 손잡이에 손을 걸치고는 살금살금 발을 내디뎠다. 눈은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다. 바로 아래층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놓여 있었다던 벽시계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시침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섭다는 것보다는 긴장이 좀 됐다. 귀신같은 건 없겠지. 두리번거리다 또 한걸음 내디뎠다. 이상하게도 올라가는 길은 올라갈수록 명암이 옅어지는 것 같은데, 내려갈 땐 한없이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는 것 같다. 이게 맞을까? 나는 왜 아까 책을 제대로 빌려오지 않은 걸까. 이준오에게는 왜 그렇게 거짓말로 둘러댔던 걸까? 괜히 신경이 막 쓰였다.
나는 기대하지 않으려고 멀리 도망만 다니다 가장 먼저 지쳐 쓰러지는 쪽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도 그렇다. 나는 엄마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캠프에 왔으면서, 소원은 엄마를 보고 싶다고 비는 것이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엄마는 엄마의 길을 갈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니까, 실은 누구보다 먼저 소원을 포기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포기가 빨랐다. 포기가 빠르면 좋은 점은 끈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쁜 점은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성격은 아빠를 닮았다. 언젠가 나는 아빠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중학교 때였던가.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은 캠프 속에서 대열을 이탈해 굳이 굳이 어두운 복도를 걷는 이탈자 같았다. 엄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내게 연락을 했겠지? 그렇지만 나는 연락을 받지 않았고, 엄마는 나를 기다릴 것이다.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엄마도 당해야지. 내가 외로웠던 만큼 엄마도 당해야지.
그런 내가 싫어서 괜히 눈물이 나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아랫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때 다시 도서실에 도착을 했다. 나는 도서실 안쪽으로 들어가 가장 깊은 곳의 형광들을 켰다. 멀리 다시 반짝하고 불이 켜졌다. 나는 그 불빛에 의지해 나에게 맞는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문이 열린 도서실엔 인기척이 없었다. 평소라면 문을 잠겄을 테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문이 잠기어 있지 않았다. 얼른 책 한 권을 골라 돌아가야지. 생각하며 조금 더 깊숙이 서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아본 곳은 문학 서고였다. 나는 내 키 높이에 맞는 책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때였다.
“도둑이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르지 않게 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고개를 홱하고 돌리자 이준오가 제 입술로 ‘쉿’하는 포즈를 지어 보였다. 이준오는 한 손에 휴대폰으로 후레시를 켜고 있었다.
“너... 뭐야. 휴대폰은 아까 제출했는데.”
“아까 낸 건 휴대폰을 닮은 기계고. 옛날에 나온 건데, 음악만 들을 수 있어. 그리고 너는 아까 누가 봐도 교실 도망칠 사람처럼 보였고.”
“어떻게 알았어?”
나는 조금 전 교실에서의 이준오를 떠올렸다. 이준오는 누구를 살피거나 교실을 산만하게 둘러보기보단 평온하게 책상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준오가 내쪽으로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말했다.
“도둑은 제발 저리니까.”
“눈부셔. 저리 치워.”
“그치만 필요한 거 아니었어? 책 제목이 보이기는 했어?”
“보여도 별로 읽고 싶은 책이 없네.”
“책 빌리러 온 거야? 아니지, 책 훔치러 왔네. 도둑맞네. 김서진.”
이준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내 옆에 와 섰다. 그리고는 책장을 비췄다.
“얼른 골라. 갈 데가 있으니까.”
나는 책을 고르다 말고 다시 이준오를 바라보았다.
“뭔데? 참, 너는 여기 왜 왔는데?”
“너 잡으러.”
“잡긴 뭘 잡아. 진짜 이유가 뭐야.”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너 아까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이준오는 아까 책을 고르지 못했으면서 어째서 책을 빌린 척했는지를 묻고 있는 듯했다. 그러게. 내가 아까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이준오에게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질투.
질투? 질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처음엔 승부욕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든 잘해 보이고 싶었으니까. 잘하는 모습이 보일 때 괜히 이준오 앞에서도 당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 테니까. 완벽해 보이고 싶었던 그 마음. 그건 결국 이준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책 한 권 고르는 일에도 이준오에게는 뭐든 잘난 애처럼 보이고 싶었던 거다. 솔직한 내 모습, 그리고 내가 왜 이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면, 이준오가 나를 별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몰라. 아까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교실에 왔을 때 책을 빌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어. 어쨌든 책만 빌려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이준오가 고개를 갸우뚱하다 천천히 끄덕여왔다. 나는 책 한 권을 꺼내 재빨리 품 속에 안았다. 사실 어떤 책인지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다. 대충 얼버무리듯이 말하고는 상황을 벗어나는 사람.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지. 진심은 꼭꼭 마음속에 감춘 채로,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정리하고, 정하다가 갑작스레 뻥하고 작은 비밀들을 터뜨리는 사람.
“됐지? 이제 교실로 돌아가자.”
나는 책을 품에 안은 채로 먼저 도서관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준오가 재빨리 팔을 뻗어 내 책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도 여기 온 목적이 있다구.”
“목적? 그게 뭔데?”
맞다, 이준오는 나를 따라왔다기 보단 제 볼일이 있었을 거다. 나는 고개를 들고 이준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번엔 이준오가 먼저 살금살금 도서실 문밖에 발을 기대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너 데리고 가야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소원 빌러. 나 소원 빌러 나왔단 말이야.”
그때 복도 쪽에서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준오가 쉿 하고 몸을 낮췄다.
“근데 벌써 이뤄지려나 보다. 소원 말이야. 아마 오늘 우린 수도꼭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준오는 정말 비밀이 많은 캐릭터인 것 같다. 이 애가 하는 말은 뭐든 알아듣기 힘드니까.
*
지금 선생님한테 들키게 된다면 어느 핑계를 드는 쪽이 나을까? 첫째, 책을 준비하지 못해서 몰래 도서실에 왔어요. 둘째, 소원을 빌기 위해서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려 했어요. 그 어느 쪽이든 벌점 하나는 제대로 챙길 것 같다.
“야, 김서진. 조금 더 조심조심 걸어!”
슬쩍 뒤를 돌아본 이준오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는 내게 말했다. 나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애초에 소원인지 뭔지를 빌지 않으면 해결되는 거 아니야? 애초에 난 책만 한 권 슬쩍 가져갈 생각이었단 말이야. 나는 이준오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는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이준오는 내가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실내화가 바닥을 긁는 것 같다며 내게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로 계단을 오르자고 했다. 이준오가 가려하는 화장실은 캠프가 열리는 교실과 도서실이 있는 중간층에 있는 화장실. 그러니까 도서실에서 다시 화장실을 가려면 한 층짜리 계단을 올라야 했다. 처음엔 영문도 모른 채 이준오와 함께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괜히 분했다. 나는 빌고 싶은 소원이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나도 모르게 낮추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도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반대편 건물의 불빛에 계단 앞으로 그림자가 커지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이준오는 제 앞으로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확 커지자 놀란 눈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뭔데!”
나는 몸을 일으킨 채 이준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나 안 해.”
내 말에 이준오 역시 벌떡 하고 일어났다.
“무슨 말이야?”
어느새 이준오의 목소리도 커져 있었다.
“애초에 난 소원을 빌 생각이 없었어. 나는 도서실 정도만 갈 생각이었다고. 나는 무사히 캠프를 하러 온 거지. 네 잘난 소원 따위를 같이 빌러 온 게 아니란 말이야.”
내 말에 이준오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아직 책도 안 빌렸거든? 내 아까운 시간 쪼개서 캠프 참여했는데 뭐라도 얻어 가야지. 나는 너처럼 한가하지 않다구.”
생각해 보니 이준오에게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김서진. 괜한 일에 휘말리지 말자. 나는 그대로 이준오를 지나쳐 다시 계단을 살금살금 올랐다. 복도와 계단이 만나는 곳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화장실은 그 앞에 있었다. 고요함이 지나치다 보면 화장실에서 수도꼭지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해진다. 그때였다.
“야, 김서진.”
이준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계단 위쪽에서 이준오를 내려다보는데 이준오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씨익 하고 올렸다.
“뭐... 뭐!”
괜히 긴장이 되어 꽉 쥔 주먹에 힘을 더 주었다. 그러자 이준오가 교복 위에 걸쳐 입은 후드티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거 필요하지 않아?”
이준오의 손에 들린 건, 내가 도서실에서 챙기지 못한 책 한 권이었다. 그것도 청소년 필독서 자리에 꽂혀 있던 책.
다시 고민이 됐다. 이준오, 어쩌면 나보다 머리가 좋은 애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망을 봐주면 그 책을 준다는 거지?”
“그래. 만약에 네가 이대로 가버리면 나는 네가 책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생님께 말해버릴 거야.”
“너, 진짜 나쁘다.”
“3반의 최영주가 그랬는데 원래 거래는 이렇게 하는 거랬어.”
최영주. 최영주는 전국에서 소문이 난 프로게이머다. 그 애랑 이준오가 친분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최영주가 게임을 잘하는 거랑 나와 거래를 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이준오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찌 됐건 내게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준오의 말을 잘 들으면 나는 무사히 책을 손에 넣은 채 교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순순히 신발을 벗어 손에 쥔 채 반쯤 오른 계단을 슬그머니 내려왔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내 물음에 이준오가 이미 다 계획이 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든 채 어딘가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준오가 가리키는 방향은 화장실 쪽이었다.
”내가 세면대로 가 있는 동안 너는 혹시나 지나치는 애가 없는지 한 번 봐줘. 나 말고도 오늘은 이 수도꼭지에 경쟁이 치열하다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쪽에서 낯선 이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처음엔 그들이 우리 가까이로 다가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침묵한 사이 낮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점점 좁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오 역시 나처럼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자세를 낮추고는 한쪽 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준오의 말에 함께 자세를 낮췄다. 이준오와 나는 화장실이 바로 보이는 캐비닛과 정수기 사이의 빈 공간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곳에는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어슴푸레 복도 쪽에서 화장실로 이어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적어도 세 명은 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뭘까?“
이준오가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이준오는 이런 상황이 재밌어 보이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준오는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어서 이 상황이 지나갔으면 했다. 나는 이런 긴장감을 즐기지 않는다.
긴장감.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두근거림. 내게 이런 종류의 긴장감은 지금까지 딱 한 번이었다. 그건 바로 매일 같이 싸우던 부모님이 어느 날부터 고요해지던 때였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의견이 맞지 않았다. 크게는 나를 고등학교에 보내는 일부터 작게는 주말 점심메뉴를 고르는 일까지. 한 번 시작된 다툼과 갈등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 손가락질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부모님이 싸우는 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런 부모님이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된 것은 무언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날 신호라는 걸 나는 눈치로 깨닫게 되었다. 그때 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여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의 예측이 확신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너무 간절하면 이미 일어난 일이 내가 확실히 알기 전까지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때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긴장감은 엄마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난다고 직접 말을 해주기까지 불쾌하게 이어졌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도무지 예측되지 않음에 대한 긴장감과 압박감. 두근거림. 이준오에겐 그런 감정이 신기하고, 재밌고, 자극적인 일일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다. 내게는 가슴이 무겁게 철렁 내려앉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다. 살금살금.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빳빳한 소재의 셔츠가 몸을 휙휙 돌릴 때마다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 봐. 경쟁자가 있잖아. 쟤네랑 같이 움직이면 되겠다.“
이준오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순간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핑 도는 듯 어지러웠다. 이준오도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몸을 숙이고는 내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제 손을 올리고는 움찔했다.
”야, 뭐야? 왜 이래. 너 어디 아파?“
그 사이 애들이 화장실 주변에서 킥킥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점점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온몸에 쥐가 난 것처럼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솟구쳤다 쭉하고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김서진. 왜 그래.“
조금 전만 해도 이준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귀가 먹먹했는데 긴장이 풀렸는지 점점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복도 바닥의 냉기가 허벅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선생님 오시라고 할까? 너 무슨, 폐소공포증 있냐? 아니, 여긴 막혀 있지도 않잖아. “
이준오가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자꾸만 흗들었다.
”이제.. 괜찮아. 너무 긴장해서 그래.“
”긴장을 해? 들킬까 봐? 걱정했잖아.“
이준오가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묻길래 나는 이준오의 한쪽 팔을 지그시 누르며 몸을 찬찬히 일으켰다.
”선생님 부르면... 너도 나도 캠프에서 벌점이야, 알아?“
내 말에 이준오가 이제 좀 괜찮아진 거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른 소원을 빌고 교실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준오가 주변을 휙휙 살폈다.
”얘들은 갔어. 그리고 나 이렇게까지 소원을 빌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이준오가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며칠 전부터 소원 얘기만 주구장창 하길래 엄청난 소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겁을 집어 먹구 한 발 뒤로 물러서니 정말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책을 주니마니, 선생님께 얘기를 하니 마니 협박까지 해놓고서는.
”너 간절한 거 아니었어?“
괜히 짜증이 나서 툭하고 쏘아붙이자 이준오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소원... 그런 건.. 나는 그냥 또 전학 가기 전에 작은 추억 같은 거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마침 그 대상으로 수도꼭지가 있었던 거고. 소원 그런 건 실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망을 봐달라고 하냐.“
이준오의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고작 그 정도의 마음으로 이렇게 큰 모험을 하려 했다니. 이준오는 워낙 전학도 많이 다니고, 성적에도 관심이 없어서 이런 캠프에서 규정을 위반하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캠프를 신청한 것부터가 앞으로 내가 세운 목표에 대한 규정 위반을 하는 일이었으니까.
”뭐 때문에 그런 거야? 너 원래 어디 아팠어?“
이준오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물었다. 나는 이준오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뿌리치며 짜증을 냈다.
”진짜... 별로다. 이준오. 너는 이 상황이 재밌기만 하지?“
”뭐?“
”너는 네 입장에서 재밌으니까 내가 어떤 기분인지, 마음인 줄도 모르고 네가 즐거운 것만 하려 하잖아. 이런 소원 따위. 네게는 가벼운 추억 정도로 여기는 캠프일지 몰라도. 내게는 진짜 중요한 일이었어. ... 지금 이 말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 먼저 간다.“
나는 이준오가 손에 든 책을 홱하고 낚아채며 이준오를 지나쳤다. 긴장감에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무엇보다 장시간 어둠 속에 있어서인지 눈앞이 계속해서 어지러웠다. 이준오 역시 말없이 나를 뒤따라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