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체 앞이 보이지 않던 어둠도 오래 바라보고 있다 보면 적응이 된다. 다 같은 어둠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눈앞의 풍경이 조금씩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어둠에도 더 어두운 것과 덜 어두운 것. 사물의 튀어나온 모서리와 무른 표면이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알게 되었다.
”야... 괜찮냐. “
캠프가 진행되고 있는 교실의 근처까지 왔을 때 조금씩 선명해지는 빛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교실에 있을 때는 불빛이 밝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잠깐 사이 교실은 내게 너무 환한 곳 같았다. 이준오는 아까부터 내 눈치를 자꾸만 살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준오가 내게 그렇게 잘못한 건 없는데 괜히 내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길 꺼냈다.
”내가 먼저 화장실 다녀온 것처럼 들어와 있을 테니까 너는 조금 이따가 들어와.“
내 말에 이준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이준오를 몇 번 뒤돌아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실에 들어왔다. 교실 안쪽으로 발을 딛자 이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야, 김서진! 너 어디 갔다 왔어! “
이제는 제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잠깐 다녀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니. 나는 이제의 자리에 있는 책을 손으로 톡톡 쳤다.
”아.. 실은 책을 안 가지고 와서. 도서실에 잠깐. 책 가지러. “
교실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해지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이 있는 자리를 보니 선생님도 지겨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세화고등학교에서 밤샘독서캠프는 책을 읽는 취지도 있지만 실은 수학여행 같은 세화고등학교만의 추억 캠프이기도 하다. 선생님들도, 애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부분이다. 애들은 학교에서 받은 간식을 먹거나 오늘만을 위해 준비한 간식을 꺼내 먹기도 한다. 원래는 규정상 안 되는 일이지만, 선생님 운에 따라 가능한 반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배정된 선생님은 후자다. 자유롭게 애들을 풀어놓는 타입. 믿어주는 타입.
”그런데 이준오도 안 보인다. 이준오 아까 화장실 다녀온다고 했는데. 혹시 오다가 못 봤어? “
이제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세, 화장실이랑 도서실은 방향이 다르니까. 화장실에 간 거라면 금방 오지 않을까. “
그러나 이준오는 내가 생각했던 시간이 지나도 교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또 딴 길로 샜나? 소원을 빌러 다시 화장실에 갔나?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어둠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테니까. 이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진짜 이준오 못 봤어? “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젓다가 이내 끄덕였다.
”실은.. 아까 이준오랑 같이 있었어. 근데 같이 들어오면 좀 이상할까 봐 내가 먼저 들어왔거든. 근데 왜 안 오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
내 말에 이제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왜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
”네가 신경 쓸까 봐. 그리고 별 일 아니기도 했어. 나는 도서관에 가다가, 이준오는 소원을 빈다고 내려왔다가 마주친 것뿐이야. “
”소원? “
”응. 그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 수도꼭지를 문지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
”그게 무슨 말이야. “
”너도 알고 있던 거 아니야? 너 그런 얘기 좋아하잖아. 이거 세화고에서 유명한 이야기라고 하던데. “
”처음 들어. 이준오가 그런 말을 했다고? “
”응. 여기 애들 다 그 소원에 관심 있는 거 아니야? “
”진짜 관심이 있었다면 다들 소원을 빌겠다고 너도나도 화장실에 갔겠지. 근데 애들 다 교실에 있잖아. 지금 이 교실에서 없는 사람은 이준오뿐이야 “
이제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제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왜 이준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던 걸까. 이제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준오를 처음 발견한 곳은 도서실이었고, 이준오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오는 내가 책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준오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내게. 소원이니 뭐니 그런 성가신 말까지 지어가면서 말이야.
”그렇단 말이지. “
이제가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의 눈치를 살피다 교실 문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한 번 나가볼까? 이준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
”무슨 일이 생겨도 학교 안인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
”혹시 모르잖아. “
이제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이제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교실 뒷문으로 가려던 찰나, 이준오가 나타났다. 이준오는 갑작스레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으로 눈썹께를 가리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제가 이준오를 뒤따라왔다.
”너 괜찮아? “
이제가 물었다. 이준오는 이제를 쓱 보더니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괜히 뻘쭘한 기분이 들어 이준오의 자리에 있던 책을 빼내어 읽었다. 이준오가 내 손에 들려진 책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
나는 적당히 낮은 목소리로 이준오에게 짜증을 냈다. 이준오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나는 괜히 이제가 신경이 쓰여 이제의 눈치를 살폈다.
”있잖아. 아까는 내가 미안한데... 다른 거야. “
”미안하면 이 손 떼. 그리고 뭐가 다르다는 거야. “
”다르다고.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거라고. “
이준오의 말에 나는 이준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준오의 눈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해. 네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한테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을 하지. 그들이 배려가 없어서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런데 네가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사람들은 다 달라. 너와 나도 다르고, 우리는 같은 일에도 다 다른 생각들을 해. 그런데 네가 먼저 그렇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
이준오의 말에 마음이 뜨끔해졌다. 그러나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준오의 말은 틀린 게 없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이준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말은 비겁하긴 하지만... 다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나도 내 사정이 있었던 거야, 서진아. 그래도 아까는 미안했어. 네가 얼굴이 창백해지니까 너무 놀랐어. 그런데 너를 괴롭히려던 건 아니었어. 그래도 미안해. “
이준오의 말에 되려 입을 더 씰룩이려 했던 건 나다. 이준오한테 당한 건 없는데 마음이 왠지 억울해졌기 때문이다. 이준오가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
나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준오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내 입밖에 매달려 있는 말들은 온통 집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오고 있는 엄마, 그 사이 집을 떠나 있겠다는 아빠. 그런 상황들로부터 도망쳐온 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 그리고 솔직해질 수 없는 고백.
어느덧 시간을 보니 시계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칠판 앞에 앉은 선생님은 피곤한 얼굴로 의자 위에서 꾸벅이며 졸고 있었고 애들 중 몇몇도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제는 책을 머리에 괸 채 엎드려 있고 이준오도 자리에서 손을 튕기며 의미 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나는 손에 든 책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도 지금쯤 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내 이준오의 말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그건 곧 내가 엄마를, 아빠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약에 이준오도 나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준오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같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
내 말에 이준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이준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졸린지 눈을 비비며 책상에 엎드렸다. 아이들도 하나둘 피곤한 얼굴을 하다 책상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새벽이 깊어갈수록 교실의 소음은 점점 줄어들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교문 밖 텅 빈 도로 위로 가끔 택시의 불빛이 빠르게 지나치다 사라졌다. 학교 밖의 간판은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들뜬 분위기의 소란스러웠던 교실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척 옆의 이준오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준오는 몸을 바로 일으켜 앉은 채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고, 엎드린 이제의 몸은 숨소리에 작게 들썩였다.
”있지. 나는 또 전학을 갈지도 몰라. 아니, 거의 아마 전학을 갈 거야. “
이준오가 내 귓가에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책장의 다음장을 넘겼다. 눈이 감겨왔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또렸했다.
”실은 그래서 새로운 학교에 올 때마다 긴장을 하곤 해. 이번엔 어떤 애들이 있을까. 초등학교 때 처음 전학 갔을 때 왕따를 당했었거든. 그 기억이 너무 별로여서 그다음부터는 소외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던 것 같아. 실은 나도 너랑 성격이 아주 비슷한 듯도 같은데,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지 않은 척하는 거지. 그게 내 불안하기도 하고. “
이준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았다. 그런 경험쯤은 누구나 할 테니까.
”그래서 처음에 반 애들한테 관심 없는 너 보니까 좀 부럽기도 하고, 내 딴에는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애들 눈치 안 보고 신경 안 쓰는 거. 애들도 그런 너 불편해하는데 너는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적정선이 있다고 믿는 거. 애쓰지 않는 태도. 그런 게 좀 짜증 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렇더라. “
이준오가 말을 마치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준오의 눈도 반쯤 감겨 있어 보였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애들과 어울리다 캠프까지 하는 건 아무리 십 대 여도 피곤한 일일 테지. 원래의 나 같았으면 이준오가 어떤 말을 하든 가만히 듣고만 있다 한 귀로 흘려보냈을 테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준오의 말은 홍이제가 내게 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잘 빠져나가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던 것뿐이야. 나는.. 생각보다 바쁘거든. “
”바빠? 왜? 입시 때문에? “
”아니. 뭐, 맞기도 해. 나는 내 계획대로만 내 인생이 잘 흘러갔으면 좋겠거든. 그냥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내 인생 시간표가 웬만하면 잘 맞아떨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힘든 일이 닥쳐도 더 크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아. 내가 바라는 건,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예측 가능한 만큼의 불행이 왔으면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도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에게 약속하는 거지. 변수 없이 살아갈 테니, 내 인생에 가급적 변수 같은 거 주지 말라고. “
”변수? 지금까지 네 인생에 변수가 뭔데? “
이준오가 책을 내려놓고는 아예 내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탁 앞의 담겨 있는 휴대폰 바구니 사이에서 계속해서 진동음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전화의 주인이 엄마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가족. “
”아. “
”처음부터 선택한 적 없었고, 언제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운명을 가지고 와. 친구나 학교 같은 건 내가 어떻게 감당하거나 무시하면 되는데 가족은 늘 그렇지 않거든. 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힘들어해야 하는 가족만으로도 인생이 무지 피곤하거든. “
”미안. 더 묻진 않을게. 그런데 상처 줄 생각은 정말 없었어. “
”괜찮아.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사소한 것들은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내가 아까까지 화를 내서 신경이 많이 쓰이나 본데, 전혀 그러지 않아도 돼. 나 너한테 별 감정 없거든. “
”그래서 미안. 별 감정 없게 해서. “
”뭐? “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이제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우리 집의 사정을 알고만 있을 뿐 우리 가족이 다들 어떤 마음인지, 내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다. 나 역시 이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알면서 이제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준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나보다는 평범할 거라고, 평범한 건 곧 행복한 거라고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가 지금 내가 사는 세계에서 내 또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어른스러운데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될까 봐 감추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학교에 있으면 애들이 하는 고민들이 때로는 시시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성적 문제라거나 친구문제 같은 것들이야 말로 가장 십 대다운 고민이 아닌가. 나는 언제나 그 너머를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홍이제나 이준오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고민은 다양했다.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을 가볍게 무시하는 부모님 이야기. 단톡방에서 몇 마디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반에서 자신을 부정당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야기. 쌍꺼풀이 없는 눈매가 고민인 아이.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걸로 우울감에 빠져 있는 아이들... 그런 고민들이 내게는 하나같이 하찮게 여겼다. 물론 이 중에는 홍이제나 이준오의 이야기도 있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고민은 아픈 법이다. 그 애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생각하더라도 나 고민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어른이 되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부모님이 없더라도 내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되었다. 대화가 없는 집. 어딘지 모르게 잘 연결되어 있던 부속품 하나가 빠져 버린 기계 공장을 매일같이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 사람들이 알까?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부속품이나 그런 것들보다는 여유롭게 한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이 하는 고민들은 인생에서 그렇게 큰 게 아닐 테니까.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준오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를 고민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도 그 친구들이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나? 가족도 헤어질 수 있고, 금세 사이가 나빠져 남보다 못해질 수도 있는데. 이제가 부모님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고 해서, 정확하게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나? 이제에게는 적당한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엄마는 끝내 자신의 꿈을 위해 나를 떠났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가족 간의 믿음은 깨진 지 오래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른들의 일에 내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뿐일 거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기.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지낼 수는 있었다. 그러고 있다 보면 내 인생에 크게 변화가 될 일도 없게 된다.
대신에,
아무도 모르겠지만 방 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 보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시간을 돌이키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엄마를 미워하거나 아빠를 미워할 수 있는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처럼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에 눈물이 나 줄줄 흘리면서 버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원 같은 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 실은 너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학교에서 그런 일이 실재하는 거였다면 다들 캠프는 뒷전이고 모두 수도꼭지에 갔었겠지. 그런데도 네가 날 따라와 준 건 네가 나한테 마음을 연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 다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아. “
때로는 방에 있을 때보다 교실이 덜 외로운 기분을 느끼는 건 아마도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소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펜을 들었다 내려놓는 소리. 크게 하품을 하는 소리. 도르르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작게 속삭이듯 웃는 소리. 이준오는 조금 졸리다면서 자세를 꼿꼿이 한 채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누군가 덥지 않냐면서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밖의 소음이 다시금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공기가 흐르는 소리와 커튼을 허공에 부응하고 띄우며 창문을 넘어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오는 것이다. 나만 생각하고 나에 대해서만 고민할 때는 들리지 않는 것들이 이준오를 바라보고 홍이제를 바라볼 때 슬며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따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작은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나는 엎드려 있는 이제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이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이제 집에 가래? “
”아니, 소원 말이야. 그거 진짜라고. “
”뭐가? 무슨 소원? 수도꼭지? “
이제가 턱밑까지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이제에게 내밀었다.
”그거 세화고에 비밀리에만 공유되는 거래. 이준오가 말해줬어. 이준오는 워낙 선배들하고 친하고, 그러니까 알게 됐나 봐.. 저기 앞분단에 두 명 정도 없잖아. 그거 소원 빌러 간 건지도 몰라. 쟤네 방송반 애들이잖아. “
이제가 머리 위로 기지개를 활짝 켜며 눈을 비비더니 나와 교실 앞 칠판을 바라보았다.
”뭐... 그거 진짜야? “
”그래. “
”네가 거짓말할 캐릭터는 아니니까. 근데 너 무슨 소원 있어? “
”있지. “
”너 그런 거 믿어? “
”안 믿어도 이런 건 빌고 보는 거야. 소원 말이야. “
내 말에 이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며 피식하고 웃었다.
”우리, 소원 빌러 가자. 너랑 나랑 이준오랑. “
”갑자기? “
”응. 오는 길에 편의점도 들려서 빵도 하나 사 먹자. “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지금 네 태도. 1년 전의 모습 같은 거 알아? “
이제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1년 전의 나는 이준오에 가까운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 친구들의 감정을 읽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누구도 기분 상하지 않는 환경이 되기를 바랐다. 무엇도 망치지 않기 위해 늘 애쓰는 아이가 나였는지도 모른다. 무엇도 망치지 않으려 했으니까 나중에는 무엇이 망쳐 저도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가 되었나. 나는 졸고 있는 이준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꾸벅꾸벅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졸던 이준오가 번쩍 눈을 떴다.
”왜.. 왜.. 잘 자고 있었는데. “
”소원 빌러 가자고. “
”소원? 나 소원.. 소원 몰라... 졸려... “
이준오는 벌써 눈이 많이 감겨오는 모양이었다. 이제가 나와 이준오를 보더니 쿡쿡하고 웃었다.
”서진이가 우리 셋이서 소원 빌러 가재. 준오야, 정신 좀 차려. “
이제는 그 말과 함께 제 손을 이준오의 목에 갖다 댔다. 이제의 손이 얼음장보다 차갑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준오가 눈을 번쩍하고 떴다.
”소원.. 소원? 그런 거 안 믿는다며. “
”믿든 안 믿든, 일단 빌어보자. 네가 알려줬잖아. 그건 세화고에서 한 번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지. “
(계속)